* 이 글은 2009년 『안과밖』기고문입니다.

 

 

네그리의 정치사상과 문학


정남영


1. 머리말


  해방 이후 한국에서 문학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 논의가 가장 활발했던 때는 80년대이다.1) 이때에 변혁의 에너지가 사회 전체에 고조된 가운데 이른바 ‘순수’문학론자들은 논의의 변방으로 밀리고 문학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진지한 이론적 견해들이 서로 다투는 모습이 문학논의의 중심부를 차지하였다.

  그런데 80년대에는 그 높은 변혁의 에너지를 이론적으로 포착하고 그 에너지가 발휘되는 방향을 제시하는 데 있어서 한계가 있었다. 당시 문학논쟁에서 바탕에 깔린 ‘정치’란 비록 부르주아적인 정당정치 혹은 의회정치에 그 시야가 국한되지 않고 사회변혁으로 향해져 있었지만 ‘권력’(‘민중권력’)의 획득이라는 지평을 넘어서지는 못하고 있었다. 정치와 문학(예술과 문화 일반도 포함된다)을 연관짓는 방식에도 문제가 있었다. 문학은 정치를 매개로 해서만 현실에 작용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정치와 무관한 문학은 현실적으로 힘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90년대에 들어와서 80년대의 변혁이론들로서는 그 타당성을 유지하기가 힘든 방향으로 현실변화가 일어나고2) 문학(과 예술을 포함한 문화영역 전반)에 상업화의 해일이 밀어닥침으로써 이제 문학이 가진 힘을 정치(사회변혁)와의 관련 속에서 사유하는 것은 점점 더 희귀한 일이 되었다. 80년대를 주름잡았던 리얼리즘론은 점점 그 명맥을 잃어갔으며 문학제도에서 권력의 문제가 부각된 바 있으나 이는 문학이 가진 진정한 힘―그것을 정치적이라고 부르든 아니든―을 논의하는 것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문학이 가진 힘을 정치와의 관련 속에서 사유하는 것이, 모두가 해야 할 일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누군가는 해야 할 필요한 일이 되었다. 근대적 의미의 정치 즉 우리에게 교과서와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세뇌된 바의 정치가 우리의 삶에 참을 수 없는 질곡으로 작용하고 있으며3), 따라서 우리는 이제 자유로운 삶을 위해 최소한 이 질곡을 우리의 머리에서 제거할 필요가 있고, 가능하다면 더 나아가 자유로운 삶에 합당한 ‘함께 사는’ 공적 구조와 제도를 새로이 만드는 일을 고민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 일은 근대적 의미의 정치의 이름으로 행해질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삶의 이름으로 행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유로운 삶이 예술과 연관되지 않는다면 과연 그 무엇과 연관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이 자유로운 삶을 다시 ‘정치’라는 이름과 연관시킬 필요가 있는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마치 모두의 문제를 권력이 해결해줄 것처럼 세뇌하는 근대 정치의 기만성을 폭로하고 해체하는 데에는 자유롭고 해방된 삶의 기획을 정치와 연관시킨 사상가들의 정치 개념을 복원하고 다시 다듬어 내는 것이 매우 효과적일 수 있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근대적 정치관을 대체할 ‘새로운 정치적 문법’에 대한 모색을 진행 중인 안또니오 네그리에게서 정치와 예술(문학)이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네그리를 택한 이유를 서두에서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 글 전체가 그 설명에 해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네그리의 정치사상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에서 시작하여 노동을 비롯한 생산활동 전반을 거쳐 예술로 옮아가고 마지막에 문학이라는 분야로 좁혀지는 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물론 많은 재정의된 혹은 새로 다듬어낸 개념들로 구성되는 그의 정치이론을 이 한편의 글에서 충분하게 설명할 수는 없기에 주제와 연관되는 핵심적인 측면에만 국한할 수밖에 없다.) 문학을 마지막에 배치한 것은 그것이 문화예술의 다른 영역들을 거느리는 특권적인 위치 혹은 정점의 위치에 있어서가 아니다. 네그리의 사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활력’이 표현될 수 있는 영역의 한 사례로서 문학에 초점을 맞출 뿐이다. 정작 중요한 구분선은 문학과 여타 비문학 영역들 사이에―네그리 식으로 말하자면 ‘보편적인 것들’ 사이에4)―그어져 있지 않다. 구분선은 다른 데 있다. 이에 대한 설명 또한 이 글의 주된 내용의 일부가 될 것이다.



2. 탈근대와 삶정치(bio-politics)


2.1 근대와 탈근대


  네그리의 삶정치론은 모든 시기에 똑같은 타당성을 가지고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이론이 아니다. 그의 삶정치론은 그가 탈근대라고 부르는 시기와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 따라서 근대와 탈근대가 네그리에게서 어떻게 구분되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네그리가 말하는 탈근대란 1968년 이후 현재까지의 시기, 일반적으로 정보혁명과 지구화로 특징지어지는 시기이다.5) 이 시기는 한편으로 자본과 주권이 그 지배방식에 변형을 준 시기이며, 다른 한편 ‘다중’으로 일컬어지는 새로운 주체성의 등장으로 자유와 해방을 향한 새로운 움직임이 시작된 시기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에게 탈근대는 근대의 정점인 동시에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다.6)

  그런데 네그리는 근대에서 탈근대로의 이행을 단순한 연속적 발전으로 보지 않는다. 그 사이에 ‘휴지’(休止, caesura)가 존재한다고 본다. 휴지는 원래 그리스의 시작법(詩作法)에서 시의 한 행 중간에 잠깐 쉬는 지점을 의미하는데, 네그리는 이것을 파열, 단절, 불연속의 지점, 혹은 패러다임 전환의 지점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한다. 다시 말하자면, 근대에서 탈근대로의 이행이 자본주의의 전개과정 내에서 어떤 불연속점을 거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 ‘휴지’ 혹은 패러다임 전환을 구성하는 것은 다음의 세 요소들이다.

  첫째,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를 향한 경향이 생산방식과 가치화과정 양자를 점증적으로 특징짓는다. 비물질노동이란 노동 자체가 비물질적인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물질적이지 않은, 근육과 신경의 소모가 아닌 노동은 없다!) 그 생산물이 비물질적인 경우를 말한다.7)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가 가지는 중요성은 단지 상품영역의 확대(과거에는 상품이 아니었거나 상품으로서 비중이 미미했던 것들이 주요한 상품이 되는 것)에 있지 않다.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는 다음 두 가지를 동반한다. 하나는 자본의 논리의 중추를 이룬 가치법칙 즉 생산에 투여된 노동시간의 양을 가치의 척도로 삼는 것이 무너지는 경향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더 이상, 노동을 생산에 투여된 시간에 따라 측정하는 고전적인 노동가치론에 따라 해석할 수가 없다. 인지적 노동은 그런 관점에서 측정될 수 없다. 심지어 이 노동은 그 측정불가능성에 의하여, 그 초과에 의하여 특징지어진다. 생산관계는 인지적 노동을 삶의 시간에 연결시킨다. 생산관계는 삶에 의해 자양분을 공급받는 만큼이나 다시 삶을 변경시키며, 그 생산물들은 자유와 상상력의 산물들이다. 이 창조성이 바로 그것을 특징짓는 초과이다. 물론, 노동은 여전히 생산과정 전체의 중심부에 남아있다. (이 점에서 우리가 맑스주의에 충실하다는 것을 우리는 긍정한다.) 그러나 그 정의는 순전히 물질적인 차원으로 축소될 수 없다.8)


  네그리가 이 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맑스가 『그룬트릿세』(Grundrisse: Foundations of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에서 예견한 ‘자본의 자기지양’(Selbst-Aufhebung)―자본은 자신에게 부과되는 한계를 계속적으로 넘어섬으로써 증식되지만 일정 지점에서는 스스로를 ‘지양’하게 된다는 것―의 시점에서 일어나는 일이 바로 가치법칙의 붕괴이기 때문이다.9)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가 동반하는 다른 하나는, 생산보다는 재생산이, 즉 삶의 단순한 도구의 생산보다는 관계들(협동)의 생산, 더 나아가 삶의 형태의 생산―여기에는 단순한 육체적 능력만이 아니라 지성(사유, 상상)이 반드시 수반된다.10)―이 더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경향이다. (모든 생산이 재생산과 연결되는 경향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둘째, 지구화로 인해서 국민국가, 민(국민, 민중, people), 주권 등의 근대적 개념들이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는 네그리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어준 『제국』(The Empire)에서 상세하게 제시된 내용인데, 본고의 주제와의 직접적 연관은 크지 않으므로 더 이상 논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셋째, 이른바 ‘삶정치’로 지칭되는 정치적 지형의 등장이다. 이에 대해서는 절을 바꾸어서 살펴보자.


2.2. 삶정치 개념의 형성


  ‘삶정치’라는 용어는 원래 푸꼬의 것이다. 그의 정의에 따르자면 삶정치는 “18세기부터 시작되는, 통치관행에 제기되는 문제들을 인구를 구성하는 일단의 살아있는 존재들에 특징적인 현상들―건강, 위생, 출생률, 수명, 인종...―에 의해 합리화하려는 시도”이다.11) 『삶정치의 탄생』에서 푸꼬는 이른바 삶권력(bio-power)―개별적 노동조직의 훈육으로부터 인구들의 통제로 이동하여 사회적 장 전체를 포괄하도록 확대된 권력―의 관점에서 삶정치의 탄생과정을 기술하는데, 이 과정은 18세기 이후부터 시작된 것이며 19세기부터는 자유주의의 전개과정과 겹친다.

  그런데 네그리가 푸꼬의 ‘삶정치’ 개념을 활용한 것과 관련하여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네그리는 이 개념을 푸꼬가 부여한 의미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변형․확대하여 사용한다. 그래서 네그리는 자신이 “궁극적으로 푸꼬에게서 추출한 삶정치 정의(定義)는 푸꼬의 저작에는 없다”고 말한다.12) 여기에 첫째로 작용한 것은 앞에서 말한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에 대한 그의 인식이다.


그러나 나는 이 독해[들뢰즈의 푸꼬 독해―인용자]를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갔습니다. 나에게 삶정치 개념은 궁극적으로 노동문제를 대면하고 다루어야 했습니다. 어떻든 이것이 내가 다듬어내는 모든 개념들에 대해서 하는 어떤 일입니다. 나는 항상 개념들을 노동과 연관지으려고 합니다. 이 때문에 나는 여전히 나 자신을 맑스주의자라고 부릅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삶정치에 대한 나의 정의가 푸꼬의 연구를 확대한 것이라고 봅니다. 쎅슈얼리티의 배치라는 맥락에서 푸꼬가 다듬어낸 정의를 무시하거나 소홀히 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다듬어낸 정의를 잡아서 확대하여 생산과 재생산의 구분이 불명료해지는 영역들에서 즉 비물질노동의 영역에서 신체의 전반적인 구축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러한 확대가 나로 하여금, 푸꼬에는 상대적으로 정의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는 어떤 것 즉 삶정치와 삶권력의 관계를 해명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13)


   둘째로 작용한 것은 들뢰즈의 영향이다. 근대와 탈근대의 사이의 휴지를 강조하는 네그리로서는 근대와 탈근대를 특별하게 구분하지 않는 푸꼬의 삶정치론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네그리는 「통제사회에 관한 후기」에서 들뢰즈가 제시한 훈육사회에서 통제사회로의 이행이라는 형태로 한 번 걸러진 것을 받아들인다.14) 훈육사회와 통제사회의 구분은 네그리의 근대/탈근대 구분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바로 이러한 여과과정의 자취가 보인다.


훈육이 신체들의 ‘해부정치’이고 본질적으로 개인들에게 적용된다면 삶정치는 이와 반대로 인구의 삶을 통치하기 위해서 인구를 통제하려고 시도하는 일종의 거대한 ‘사회적 의료’를 나타낸다. 이제 삶은 권력의 장에 속하게 된 것이다.15)


  이렇게 지배방식을 바꾼 권력 즉 삶권력이 네그리가 말하는 삶정치의 주된 ‘적’이다. 그리고 이제 적대의 구도는 근대에서처럼 권력(부르주아 권력) 대 권력(노동자 혹은 민중권력)의 대립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16)


우리는 이와 반대로 자유, 특이성, 그리고 활력이 권력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들로서 등장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 것 아닌가?17)


바로 이러한 상상이 네그리의 삶정치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삶정치의 주요한 적대구도는 삶의 활력 대 권력18)이 된다.


2.3 활력과 권력의 대립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활력과 권력의 대립은 두 실체들 사이의 대립이 아니라 존재의 힘과 ‘무의 힘’(the power of the nothing) 사이의 대립이라는 점이다. 이는 예컨대 거리에서 벌어지는 촛불들과 전경들의 대치가 어떻게 실체들 사이의 대립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차원에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이 반문의 부절적성은, 장(場)의 형태로 존재하는 삶권력은 촛불들에게도 또 전경들도 마찬가지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 스스로의 조건과 선택에 따라 삶권력에 종속된 정도가 결정될 뿐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금세 드러난다. 실체들 사이의 대립을 유도하는 것은 (전경들을 국가폭력으로 활용하여 촛불들과 부딪치도록 하는 것은) 권력이 하는 일이지 활력이 하는 일은 아니다. 어떻든 활력과 권력의 차이에 대한 네그리 자신의 설명을 들어보자.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권력은 삶의 활력을 앗아갑니다. (...) 나는 삶을, 서로 모이거나 헤어지고 그러면서 구성하는, 구성의 순간을 함께 산출하는 특이성들의 다중으로서 파악합니다. 그러한 다중은 권력에 의한 힘의 박탈에 지속적으로 종속되어 있습니다. 이 박탈은 다중을 구성하려는 시도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치지요. 바로 이런 식으로 이원적 관계들은 무한한 구체적 관계들로 전환됩니다. 어떤 조로아스터적인 형이상학적 해결을 기다리는 제일 원리들의 양극성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지요.19)(인용자의 강조)


  다시 말해서, “무한한 구체적 관계들”은 삶권력이 특이한 활력에 한계를 부과하고 활력이 이 한계에 맞서서 그것을 넘어서기 위하여 싸우는 (혹은 싸우지 못하거나 싸우지 않는) 무한히 다양한 양태들로 존재한다는 것이다.20) 따라서 활력의 일정한 박탈이란 곧 그만큼 더 좁혀진 한계를  의미하고 이는 곧 그만큼 더 삶권력이 존속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활력이란 무엇인가? 아니, 네그리에게 삶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앞의 인용문에서 이미 네그리가 말하는 삶의 핵심적인 정의―“서로 모이거나 헤어지고 그러면서 구성하는, 구성의 순간을 함께 산출하는 특이성들의 다중”―가 제시된 바 있다. 그러나 중요한 개념 혹은 용어가 이러한 짧은 정의만으로 그 의미가 충분히 제시되는 경우란 없다. 따라서 삶에 대한 네그리의 생각을 좀 더 들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네그리는 삶을 잘못 이해하는 사고방식으로서 ‘실증주의적 생기론’(positivistic vitalism)21)을 비판한다. 생기론은 삶으로부터 모든 정치적 힘을 제거하고 삶을 생물학적이고 자연물적인 것으로 본다. “삶은 기껏해야 한 무더기의 살과 뼈로 환원된다.”22) 이것을 네그리는 ‘Bios’를 ‘Zoe’로 환원하는 것이라고 부른다. 삶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네그리가 보기에 삶에 대한 정치적 긍정으로 향하는 경향이 아니라 죽음정치(thanatopolitics)로의 경향을 낳는다. 네그리는 생기론의 해악을 이렇게 말한다.


생기론의 안개 속에서는 식별이 있을 수 없다. 삶과 죽음은 거대한 모호성의 관계에 휩쓸린다. 개인들 사이의 전쟁이 본질적으로 되고, 공격적 동물이 시장에 의하여 격앙된 사회와 공존하는 것이 자연적 규범으로서, 즉 으로서 제시된다.23)


“따라서 생기론은 항상 반동적인 철학이다”라고 네그리는 말한다.24) 예를 들어서 생명을 무기로 삼는 ‘가미카제 행동’의 경우, 그 행동의 선택의 뿌리에 있는 고통과 절망―이를 네그리는 ‘정치적 정동’(political affects)이라고 부른다―을 간과한다면 ‘Bios’를 ‘Zoe’로 환원하는 것이 되고, 그 행동으로부터 삶정치적 힘을 제거하게 된다는 것이다.25)

  이렇듯 네그리가 말하는 ‘삶’이란 생기론에서의 ‘생명’과는 다른 것이다.26) 그것은 우선 사유의 구축, 인공물로서의 사유의 구축을 포함한다. 다음으로 자유로운 주체성(다중)의 구성을 포함한다. (네그리에게서 삶정치의 궁극적 핵심은 새로운 주체성의 생산이다.27)) 그리고 자본이 전지구적인 규모로 사회적 삶 전체를 포섭하였고 권력이 삶권력으로 변모한 탈근대에 삶은 그 자체로 정치적 지형―네그리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모든 정치적 사유의 재발견된 지형”28)―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철학적인’ 논의는 삶(의 활력)에 대한 설명으로서 충분할 수가 없다. 활력의 표현은 항상 특이하기에 철학에 특징적인 ‘일반화하여 말하기’를 가지고 그것을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예술에 대한 네그리의 견해에서 삶의 활력에 대한 보완적 설명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3. 다중과 예술


3.1 정치와 상상력, 그리고 예술


  예술에 대한 네그리의 견해를 살펴보기 전에 그 징검다리로서 삶정치와 상상력의 관계에 대한 네그리의 생각을 알아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예술과 상상력의 관계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것이라서보다는 네그리에게서는 상상력이 정치(삶정치)에서나 예술에서나 동일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네그리는 옥중에서 스피노자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스피노자 철학의 전환29)이 상상의 구성적 힘을 깨닫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30) 여기서 네그리는 스피노자에게서 상상이 작용하는 세 수준을 구별해낸다.31) 첫째는 상상이 허위와 환상(illusion)을 구성하는 기능을 하는 수준이다.32) 둘째는 환상이 실재(reality)를 구성하는 수준이다.33) 환상의 활동적 성격이 환상을 실재적으로 만들고 따라서 진실하게 만든다. (이 단계에서 정치개념이 계략과 지배에서 상상과 구성으로 변형된다.) 셋째는 인간의 활력과 자연의 활력이 접목하여 상상이 존재론적 토대가 되는 수준이다.34)

  탈근대란 이 셋째 수준 즉 “인간의 활력과 자연의 활력이 접목하여 상상이 존재론적 토대가 되는 수준”에 도달한 시대이다. 탈근대에는 말하자면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다는 의미의 자연이 사라진다. 모든 것은 노동(혹은 인간의 생산활동)의 산물이기에 인공물이다.35) 따라서 탈근대에서는 노동의 역량이 인간이 상상한 것을 새로운 존재의 구성으로 곧바로 이어줄 수 있다.

  네그리는 상상의 이러한 구성적 힘에 대한 인식으로 인하여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이 정치학으로 변형된다고 본다.


정치학은 상상의 형이상학, 인간이 실재를 구성하고 세계를 구성하는 것에 관한 형이상학이다. 진실은 상상의 세계에서 산다. 실재를 완전히 다 말해주지는 못하지만 실재에 열려있으며 실재를 구성하는, 즉 내포적으로 진실한, 적실한 생각들을 갖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의식은 구성적이다. 존재는 발견되는 어떤 것일 뿐만 아니라 (소유물일 뿐만 아니라) 활동이며 힘이다. <자연>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제2의 자연, 근인(近因, the proximate cause)의 자연, 구축된 존재 또한 있는 것이다. (...) 상상활동은 존재론적 법령의 수준에 도달하는데, 이는 분명 예언의 진실성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진실을, 인간의 행동의 적극성과 생산성과 사회성을 공고히 하는 것이다.”36)


  이제 정치는 가능한 것을 실현하는 행위가 된다. “옛날에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해보자’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할 일은 가능한 것을 해보는 것뿐입니다.”37) 그렇기에 들뢰즈․가따리에게서는 그다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았던 ‘가능성’ 범주가 네그리에게서는 핵심적인 중요성을 차지한다. 들뢰즈․가따리는 실재적인 것(the real)을 가능한 것(the possible)과 짝지우고, 잠재적인 것(the virtual)과 현실적인 것(the actual)이 실재적인 것을 구성하는 것으로 본다. 들뢰즈․가따리의 관심은 주로 이 후자의 짝패―잠재성과 현실성―에 있었다. 네그리는 『제국』(The Empire)에서는 가능성 범주가 잠재성과 현실성을 매개하는 것으로 보지만,38) 『공통적인 것을 찬양하며』에서는 이 견해를 철회한다. 근대에서는 가능성이 우연에 좌우되었으나 이제 탈근대에서 가능성은 일어날 수 있는 힘, 현실화될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상상력은 활력의 한 양태가 된다. 그리고 상상의 구성적 힘을 바탕으로 하는 스피노자의 정치학은 네그리의 삶정치론의 밑바탕이 된다.

  마이클 하트는 변증법적 과정이 3단계(정-반-합39))임에 반해서 네그리가 말하는 삶정치적 과정은 2단계임을 지적한 바 있다.40) 이는 파괴적 계기(pars destruens)와 구성적 계기(pars construens)로 이루어진다.41) 즉 기존의 것을 부수고 그 위에 새로 짓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계기 사이에는 어떤 불연속의 틈 같은 것―위치는 있으나 존재는 없는 것―이 존재한다. 이것을 네그리는 진공(le vide)라고 부른다. 진공이란 말하자면 파괴가 진행된 이후에 아직 아무 것도 구축되지 못한 ‘무’의 상태이다. 그런데 이 진공(무)에 대해서 두 가지 태도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이 진공 자체에 갇혀서 그 너머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네그리는 하이데거를 그 대표적인 철학자로 든다.42) 두 번째(바로 네그리의 것)는 이 진공을 활력의 역량에 따라서 무엇이든지 가능한 조건으로 보는 입장이다. 그런데 여기서 구축되는 새로운 존재는 이전에 존재했던 것의 반복이 아니라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의 구성이기에 상상(력)을 필연적으로 함축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 인공물 아닌 것이 없다면 상상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존재의 구축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근대에서 탈근대로의 이행은 상상력의 대대적인 해방의 가능성을 역설적으로 함축한다. 그런데 네그리에게서 상상력의 전면화란 곧 예술의 전면화이기도 하다. 그는 존재 자체에 상상과 창조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존재에 직접적으로 접근하는 한에서 예술은 상상력의 최상위의 행동”이라고 보기 때문이다.43) 그렇다면 예술의 운명은 곧 상상력의 운명이 된다. 실상 블레이크를 비롯한 영국의 주요한 낭만주의 시인들, 그리고 디킨즈, 로렌스 등등의 작가들은 작품의 창조자들이라는 점에서 상상력의 지킴이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진전에 의하여―근대의 진전에 의하여― 사회 전체적으로 상상력이 억압되는 상황을 비판적으로 기록한 파수꾼들이기도 했다.44) 네그리도 근대를 이렇게 보는 점에서는 같다.


우리가 구축한 저 근대성은, 그 공허의 막대한 양으로 우리를 무력하게 한다. 무분별하지만 일상적이며 연속적인 사건들을 끔찍한 연속―이런 식으로 근대성은 모습을 드러낸다―을 통해서 우리를 무력하게 하는 것이다.45)


  탈근대가 이러한 예술과 상상력의 운명에 변화를 가져왔다면 이는 네그리가 보기에는 무엇보다도 노동의 성격변화에 기인한다. “노동의 변형은 예술의 변형을 해독하기 위한 열쇠를 우리에게 주었다.”46) 이것이 다음 절의 주제이다.



3.2 노동과 예술


  앞의 인용문에서 나온, 개념들을 항상 노동과 연관시키려는 네그리의 태도는 예술의 문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다시 말해서 예술에 대한 네그리의 생각은 기본적으로 노동에 대한 생각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네그리가 노동을 보는 시각은 자본의 시각 즉 죽은 노동의 시각이 아니라 산 노동의 시각이다. 자본의 시각에서 볼 때 노동은 잉여가치를 증가시키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잉여가치를 증가시킨다 함은 사물들이 사용가치의 측면에서 갖는 무한한 질적 다양성을 동질성으로 환원하고 오직 양적 차이―화폐가 이를 표현한다―만을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무엇을 만들었느냐보다는 얼마짜리를 만들었느냐가 중요해진다.)

  그러나 산 노동은 이와는 다른 일을 할 수 있다. 산 노동에 의한 생산이 단순한 도구의 생산에 그치지 않고 삶의 재생산이 될 때, 다시 말해서 삶을 새로운 형태로 갱신할 때, 이 때에는 기존의 척도―자본의 경우에는 가치법칙―로는 측정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출현하게 된다.47) 이 기존의 척도로 측정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네그리는 ‘초과’라고 부른다.48) 초과의 생산이 네그리에게는 바로 아름다움의 생산이다.49) 아름다움의 생산은 노동의 안에 잠재적으로 들어있는 것이다. 다만, 최근에서야 비로소 네그리는 이것을 명확하게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2004년인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당시엔 아직 감추어져 있었던 조건이 명백하게 되었고, 또 (추상적 노동의 세계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다중의 한복판에서 특이성과 공통적인 것을 연결하는 저 살아있는 노동의 내부에서도, 아름다움이 온전히 그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50)


  예술활동은 노동 속에 잠재적으로 들어있는 이 창조성을 애초부터 구현해온 활동, 그런 의미에서 애초부터 해방된 활동이다. 또한 예술은 “자유를 향유하기 위한 대중의 노동을 가치화하고자 하는 활동으로서, 그리고 집단적 노동력의 해방을 통해 존재의 초과를 구축하는 것으로서, 자본주의의 지배를 거부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51)

  자본이 아직 사회 전체를 지배하지 못했던 시기에 예술은 자본 외부의 공간들에서 스스로를 보존하고 있었다. 시각에 따라서는52) 이것을 한가로운 부유층의 전유물로 경멸할 수 있겠지만, 네그리는 이 경우에도 예술은 여전히 반자본주의적인 것으로 본다. 그래서 문예후원(메세나)을 “예술가들이 자본의 노예로서 존재하도록 해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본의 노예가 되어야 할 필요성으로부터 해방시켜준” 것으로 긍정적으로 본다.53)

  자본이 사회 전체를 실질적으로 포섭하게 된 시대인 탈근대에 들어와서는 근대에 존재했던 주변―초과의 생산이 드물게 가능했던 곳―이 없어지고 이른바 교환가치가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바꾸어 말하자면, 온통 시장(市場)이 된다. 삶 전체에 스며든 이러한 전개 즉 자본주의의 확대는 모든 예술작품을 상품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다시 말해서 해방된 자유로운 노동을 노예의 노동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예술의 존재를 위협하게 된다.54) 이제 예술은 자기보존이 아니라 반란과 저항과 거부의 전위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네그리는 예술을 삶정치의 전위로 본다. 그러나 이 경우의 전위는 ‘지도-피지도’로 특징지어지는 전위가 아니다. 그가 말하는 전위는 “시간을 자기 뒤에 질질 끌고 다니지 않고 그것을 철저히 구축”하며, 초과의 생산이라는 “아름다움의 정의를 대표한다.”55)

  네그리는 시장의 보편화 속에서 사라져간 예술에 대한 향수―이는 절망에 다름 아니다―라는 지평에 갇히지 않는다.56) 상업화의 해일에 휩쓸린 가운데에서도 예술은 잉여가치로 환원될 수 없는 반(反)시장 혹은 반자본주의적 활력을 잠재적으로 갖는다고 본다. “예술이 잉여가치로부터 구별되는 것은 예술노동이 해방된 노동인 한에서이고 따라서 생산된 가치가 자유롭게 생산된 존재의 초과인 한에서야.”57)

  탈근대에 예술이 이러한 잠재력을 대대적으로 현실화할 조건을 맞는 것은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라고 부르는 노동변형에 의해서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비물질노동의 가장 큰 특징은 그것이 삶의 형태의 생산―따라서 삶의 재생산―이라는 점에 놓여있다. 네그리에게서 삶의 재생산이란 바로 예술적 창조의 조건이다. “예술은 삶이 재생산되는 곳에서 삶에 스며든다.”58) 삶에 단순히 무엇이 추가된다거나 잉여가치의 증식처럼 양적인 증가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새롭게 생성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가 경향으로서 강화되면 될수록, 노동이 비물질적으로 되면 될수록,59) 노동의 생산활동은 초과의 생산가능성이라는 점에서 예술적 생산활동과 다를 바 없는 것이 되고, 예술은 근대에서처럼 좁은 의미의 노동의 주변부에서 일어나는 희귀한 사건이 아니게 된다. 예술과 노동의 경계 혹은 예술적 생산과 여타의 생산의 경계가 무너지게 된다. 이러한 경계붕괴의 결과로 예술이 대표하는 반란과 저항과 거부는 모든 생산활동으로 확대되게 된다.60) 바로 그렇기 때문에 네그리는 자본과 권력에 대한 저항이 어디에서나 가능하다는 주장을 그의 삶정치론의 중요한 요소로 삼고 있는 것이다.



3.3 예술과 다중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네그리에게서 예술적 창조와 삶정치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음이 어느정도 분명해졌으리라고 본다. 예술작품의 창작이 또는 어떤 생산활동이 정치라는 범주를 매개로 해서 현실에 힘을 미친다는 생각은 네그리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네그리에게서 예술창작은 그 자체로 혁명이다. 혹은 예술은 그 자체로 삶정치적이다. 그런데 네그리에게서 예술과 삶정치의 동근성을 말하는 데에는 예술과 다중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 더 필요하다.

  앞에서 우리는 삶정치적 과정이 예술적 창작과정과 마찬가지로 초과를 생산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과정은 파괴와 구성으로 이루어지며 그 사이에 불연속의 틈이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네그리가 생각하는 존재혁신의 과정은 불연속적이지만은 않다. 만일 말 그대로 불연속적으로만 이 과정이 이루어진다면 기존의 것이 파괴된 후에 우리는 항상 제로상태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인간의 역사의 상당한 부분은 이렇게 제로상태로 다시 돌아가는 사례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근대 이후 즉 자본주의의 발전 이후 지역들 사이의 연결성이 증가하면서 파괴가 일어나더라도 뒤로 돌아가지 않고 파괴된 시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기 시작한다.61) 이러한 연결성과 그 상호협동성을 다중(특이성들의 수평적 결합)과의 관계에서 발전시킨 것이 네그리의 ‘공통적인 것’ 개념이다. 공통적인 것(공통성)이란 특이한 것(특이성)과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이루며 다수의 특이성들(a multitude of singularities)이 단지 서로 연결되어 있는 데 그치지 않고 서로 창조적으로 협동하여 이루는 새로운 차원의 특이한 것을 포착한 개념이다. (이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더 설명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 공통적인 것이 역사적 과정의 연속성을 담보한다. 이런 의미에서 삶정치적 혁신의 과정은 불연속과 연속이 공존하는 과정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삶정치적 과정의 핵심은 새로운 주체성의 생산임을 이해해야 한다. 이 로 인해서 네그리는 다른 '맑스주의자'들로부터 주관주의 혹은 주의주의라는 비판을 종종 듣고 있지만, 실상 네그리의 이러한 생각은 니체, 푸꼬, 들뢰즈․가따리를 거치기 이전에 맑스에게서 이어받은 것이다.


만일 우리가 부르주아 사회를 길게 그리고 전체적으로 본다면 사회적 생산과정의 최종적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은 항상 사회 자체 즉 사회적 관계들을 맺고 있는 인간 자체이다. 생산물 등등처럼 견고한 형태를 띠고 있는 모든 것은 단순히 한 계기로서, 이 운동 내에서 생겼다 곧 사라지는 순간으로서 나타난다. 직접적인 생산과정 자체도 여기서는 단지 한 계기로서 나타난다. 그 과정의 조건들과 대상화들 자체도 마찬가지로 계기들이다. 주체로서 나타나는 것은 오직 개인들이다. 물론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개인들이다. 이 주체들은 새로 생산되는 것만큼이나 재생산되기도 한다. <이 주체들이 그들이 창출하는 부의 세계를 갱신하는 정도로 자신들을 갱신하는 연속적 운동과정>.62)


  네그리에게 주체성의 생산은 곧 다중의 형성을 의미한다.  다중은 결코 완료되고 고정된 형태로 존재하는 집단이 아니다. 하나의 계급의식으로 강고하게 뭉쳐 계급의 이익을 관철하고 권력을 쟁취하는 집단으로서의 계급 개념은 다중과 거리가 멀다. 다중은 이른바 ‘인격체들’(persons)로서의 개인들의 집합이 아니라 특이성들의 집합이다. 다시 말해서 인격체들을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구성하는 활력의 벡터들의 집합이다. 그 존재양태는 푸꼬의 ‘장치’(dispositifs)나 들뢰즈․가따리의 ‘배치’(agencement)와 같다. 삶정치의 핵심을 다중의 형성으로 볼 때 앞에서 말한 초과의 생산이란 이제 다중이 전과는 다른 활력의 수준으로 제고되는 방식으로 갱신되는 것―이것을 앞으로는 편의상 ‘다중의 생성’이라는 말로 나타내기로 하자―으로 이해된다. 이런 의미에서 네그리는 특이성들의 수평적 연결에 수직화가 병행한다고 말한다.63) 여기서 수직화는 권력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위계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중의 생성, 활력의 새로운 차원으로의 상승, 새로운 존재의 구성 등등을 말한다.

  네그리는 예의 수직화가 가져오는 귀결을 ‘공통적인 것’(the common)과 연결시킨다. 네그리(와 하트)의 다중기획의 변별적 특징은 특이성들의 연결 자체보다는 바로 이 공통적인 것의 형성에 있다. 네그리는 특이성들과 그 상호연결에 대한 인식을 들뢰즈․가따리와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들뢰즈․가따리에게는 공통적인 것에 대한 인식이 별로 없다는 것이 네그리의 불만이다.64) 단지 특이성들의 수평적인 연결에 그치고 말며, 종합―변증법적이지 않은 종합―이 부재하다는 것이다.65) 다중의 기획은 이 수평적인 연결을 공통적인 것과 연관시킨 것이다. 다중의 기획은 공통적인 조건에서 출발하여 공통적인 과정을 거쳐 공통적인 것의 갱신과 확대를 낳는다. 여기서 공통적인 것의 갱신과 확대의 성격을 오해하면 안된다. 공통적인 것이란 특이성들(이는 특이한 신체들에 다름 아니다)이 모여서 이루는 것이지만, 그 모여있는 것 자체가 하나의 특이한 신체를 이루며, 이것이 초과를 낳는 생성의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특이성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특이화 과정의 연속이 바로 다중의 생성이다.

  다중에 관해 이렇게 긴 설명을 한 이유는 다중의 형성과 예술적 창조가 동일한 원리로 이루어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다중이 창조적인 방식으로 행동하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이 자율성[예술의 자율성―인용자]이 존속한다.”66) “예술이란 운동상태에 있는 특이성들로 이루어지는 다중이고 하나의 신체를 다른 한 신체의 품 안에 두는 운동들의 무한성이지.”67)  또한 바로 그렇기에 네그리는 (만일 혁명이란 것이 다중의 활력의 표현을 말하는 것이라면) 예술은 혁명을 앞질러 구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예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신체들이 예술을 재전유한 한에서야. 예술은 이제 다중의 모든 실천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지. 신체들 안에서 비로소 예술은 여러 가지 새로운 변신적 합성을 시도하는 것이야.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누가 알겠어! 이렇게 해서 예술은 위로하는 역할을 그만두었고 초월적, 혹은 선험론적 극단을 나타내는 것도 그만 두었어. 그게 무엇이든 말이야...... 예술은 삶이기도 하고 합체이기도 하고 노동이기도 하고...... 예술은 더 이상 결론이 아니야. 반대로 예술은 하나의 전제조건이야. 기쁨 없이, 시학 없이 혁명은 더 이상 있을 수 없겠지. 되풀이하지만, 예술은 혁명을 앞질러 구현한 것이니까. 68)



4. 다중과 문학


  네그리는 문학과 문학을 제외한 다른 예술분야 사이에 활력의 표현이라는 측면에서의 고정된 우열관계를 설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언어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여기서 ‘특별함’이란 위계상의 고저 문제가 아니고 공통적인 것을 설명할 경우 그 사례로 언어를 드는 것이 매우 유용하다는 데서 온다. 네그리와 하트는 특히 공통적인 것과 맺는 3중 관계를 설명하는 데 언어를 사례로 든다. ① 우리의 ‘말하는 힘’은 공통적인 것, 즉 우리가 공유한 언어에 기초하고 있다. ② 모든 언어적 행동은 공통적인 것을 창조한다. ③ 언어행위 자체는 공통적으로, 대화 속에서, 소통 속에서 수행된다. 언어에 의해 예시된 공통적인 것과의 이 3중 관계는 비물질노동 일반을 특징짓는다.69) 다시 말하자면 비물질노동 일반의 대표적 사례로서 언어를 드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이미 짐작될 수 있는 일이지만, 네그리(와 하트)가 공통적인 것을 설명하면서 참조하는 언어란 예컨대 들뢰즈․가따리가 『천 개의 고원』 4장에서 비판한 바의 ‘언어’, 일반적인 언어학의 대상으로 된 ‘언어’가 아니라 활력의 표현으로서의 언어이다.


마이클과 내가 수학보다는 언어를 계속적으로 참조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언어는 표현적―즉 혁신적―성격을 가집니다. 언어적 유통은 형식적 요소들의 유통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식으로 말하는 표현적 요소들 사이에서의 유통입니다. 다중 개념의 토대를 이루는 요소는 단순히, 특이성들로 분해되거나 다시 모여 통일체를 이루는 형식적 집합 개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지속적으로 스스로를 다시 결집하고 다시 배열하여 언어로 만드는 특이성들이라는 개념입니다. 따라서 공통적인 것은 정체성(identity)으로서, 결집시켜주는 요소70)로서, 혹은 심지어는 특이한 양태들이 다시 결합하여 존재가 되는 장소로서 미리 전제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공통적인 것은 특이한 양태들이 다시 결집하여 특수하게 담론적이고 번성하는 존재가 될 때 일어나는 어떤 것입니다.71)


  또한 네그리는 공통적인 것이  존재론적 지속성을 갖느냐는 물음에 대해서는 이렇게 대답한다.


대답은 단호하게 ‘아니다’입니다. 마이클과 나는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연속적인 구축, 해체와 재구성의 연속적인 과정일 뿐이라고 말하며, 그러한 과정에 형상을 부여하기 위해서―즉 이 과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다중의 구축행위와 표현적인 사회적 활동의 탁월한 사례인 언어 사이의 유사성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72)


  이는 언어 자체가 그것이 표현적인 경우에는, 즉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경우에는 다중과 동일한 원리를 갖는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존재의 혁신과 주체성 생산의 핵심도 바로 표현을 통해 새로운 의미가 생산되는 데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의미를 초과로서 표현할 때, 따라서 ‘표현이 생산될 때’ 우리는 실존에 스며들고 존재의 지형에 혁신을 가져온다. 따라서 우리는 초과를 의미, 표현, 잉여의 생산으로서, 주체성의 생산으로서 분석해야 한다.73)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언어는 당연하게도 상상(력)과 긴밀한 관계를 갖는다.


상상은 언어적 제스처이며, 따라서 공통의 제스처이다. ‘장차 올 것’을 알고 구축하고 힘으로 조직하기 위하여 그 위에 그물을 던지는 제스처이다.74)


상상력의 힘을 어떤 고정된 형상을 그리는 것으로만 이해한다면 상상이 언어적 제스처라는 말을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고정된 형상들은 그 완결성이 깨지지 않고서는 모여서 새로운 형상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에서는 새로 모여서 새로운 표현을 산출하는 과정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의미에서 언어는 표현활동의 가장 일반화된 형태이다.

  물론 언어에서 표현 즉 새로운 의미의 생성이란 근대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보편적 잠재성을 가진 탈근대에서도 항상 현실화되는 것은 아니다. 시장의 보편화라는 상황이 늘 언어를 활력의 부재라는 상태로 밀어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네그리가 훼손된 언어라고 부르기도 하고 순환적인 언어라고도 부르며 또 일상 언어의 반복이라고도 부르는 것은 다 언어의 활력 부재상태를 지칭하는 말이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언어의 영역에서 일어난 사물화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바흐찐이 일찍부터 지적했던 것이지만, 계급투쟁은 공장이나 거리에서만이 아니라 언어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75)

  사실 네그리가 말하는 언어를 문자 및 그것의 음성적 상응물에 국한되는 것으로 보면 안된다. 표현력을 가지고 있다면 이미지들, 문자가 아닌 기호들, 제스처들 등도 언어를 구축할 수 있다. 아니, 인간의 현실에서는 표현성을 띠지 않은 사물이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네그리는 “예술이란 활력의 상형문자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며76) 또한 “예술은 우선 새로운 존재를 엿보게 해주는 새로운 언어의 구축이지”77)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문학’이라는 보편적 이름은 문자와 그 음성적 상응물을 질료로 하여 구축되었다는 공통점만 지칭할 뿐이지 그것이 활력의 표현인지 아니면 활력의 부재인지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예컨대 문학비평이 해야 할 중요한 작업은 문학을 통째로 부정하거나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활력의 표현과 활력의 부재를 구분하는 일―만일 우리가 삶의 활력을 표현하는 문학을 삶문학이라고 부른다면, 삶문학을 식별해내는 일―이다. 그리고 이는 삶의 모든 다른 영역에서도 행해져야 할 일이다. 그리하여 삶예술, 삶문화, 삶정치 그리고 (경제가 아니라!) 살림을 식별해내야 할 것이다.78) 왜냐하면 그것들이 다시 우리의 새로운 창조와 생성의 밑바탕[res gestae]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5. 맺는 말 ―리얼리즘의 문제


  네그리는 리얼리즘문학에 관해서도 나름의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간략히 살펴보는 것이 이 글의 마지막 작업이다.

  네그리는 리얼리즘이 탈근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본다. “리얼리즘은 우리 시대에 적합하고 존재가 나타나는 극적인 추상에 적합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 분명히 위대한 리얼리즘은 항상 존재의 초과를 생산해내는 집단적인 행위였지.”79) 다만 그는―지금까지 살펴본 그의 견해에 걸맞게―리얼리즘 문학을 철저하게 실재(리얼리티)의 구축의 측면에서 본다. “리얼리즘은 우선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구축적이라 할 수 있지. 리얼리즘은 세계를 모방하지 않고 재구축하는 시학이야.”80) 구축의 방식은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분석과 재합성의 방식으로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고전적인 리얼리즘의 대표자들로 알고 있는 만조니(Manzoni), 발자끄, 똘스또이 등이 여기에 속하고 탈근대에는 한트케(Handke)가 여기에 속한다.81) 다른 하나는 펑크의 방식이다. 이는 “분석하여 재합성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념형을 번성시키고, 적대로부터 카타르시스를 얻어내는” 방식이다. 단떼, 스땅달, 낭만주의자들, 프루스트, 카프카, 그리고  탈근대에는 펑크가 여기에 속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80년대 한국의 리얼리즘론들에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으로 대립되는 것으로 파악되었던 두 유형이 모두 네그리에게서는 리얼리즘의 이름 아래 포괄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네그리의 리얼리즘론은, 문학은 현실의 특수한 형태의 반영이라는 생각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모더니즘문학(대표자로서 카프카)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담고 있는 루카치의 리얼리즘론과 전혀 다른 것이 된다. (80년대의 리얼리즘론들 중에는 현실반영이 가진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거기에 머물지 않고 시적 창조의 측면을 강조하는 데까지 나아간 문학론도 존재했었다. 백낙청의 리얼리즘론이 한 사례이다. 그러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대립시킨다는 점에서는 루카치의 리얼리즘론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다른 리얼리즘론들도 그랬다.)

  네그리의 이 견해는 1988년의 편지에서 제시된 것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 우리의 리얼리즘의 그 다종다양한 방법론의 대안이 되는 미학이 언젠가는 가능할 지의 여부를 자문해보아야 한다”고 여운을 남기는 대목도 있기 때문에82) 네그리가 지금도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의 중요성을 그때처럼 생각하고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따라서 네그리의 견해를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을 되살리자는 제안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물론 『예술과 다중』에 실린 앞의 두 편지들과 중간의 소개글(각각 1999년, 2001년, 2004년)에서 드러나고 있듯이 예술에 대한 그의 기본적인 생각에 변함은 없다.

  ‘리얼리즘’이라는 말에서 그 정수를 뽑아낼 필요는 있다. 이 말의 활력을 제곱하여 표현한 ‘진정으로 실재적인 것’(the really real)이 바로 그 정수이리라. 네그리에게서 ‘진정으로 실재적인 것’은 바로 존재의 초과로서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그에게 이 아름다움의 생산이란 곧 혁명이며 참여이다.


이는 아름다운 것을 생산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혁명적이라는 말이지. 이는 또한 아름다운 것을 생산해내는 예술가는 필연적으로 참여적이라는 것을 확언하는 셈이다. 만일 그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는 위선자이다. 아니면 예술가가 아니다.83)


  앞의 논의에서 드러났겠지만, 네그리에게 ‘예술가’란 좁은 의미의 전문예술가들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다중이, 우리 모두가 바로 잠재적 예술가들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이 잠재성을 삶의 모든 방면으로 실현하는 것―이것이 바로 삶정치이다. ♠


1) 70년대의 참여․순수논쟁은 문학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건강한 의식이 모습을 드러내는 초기적 양태였다는 점 말고는 어떤 이론적 성과를 남기지 못한 듯하다. 


2) 선진국들에서는 70년대부터 진행되었던 이른바 정보혁명이 한국에서는 이때 시작되었다.


3) 이 질곡은 현실 속에 존재할 뿐 아니라, 아니  그보다 더욱, 우리의 머릿속에 존재한다. 블레이크가 말한 ‘머리가 만들어낸 속박들’(mind-forged manacles)이다. 


4) 문학작품들은 다 다르다. 이것을 ‘문학’이라는 하나의 집단으로 묶는 것은 보편적인 것으로 차이를 포획하는 것에 해당한다. 이렇듯 보편적인 것은 새로운 경험을 기존의 틀 안에 포획하는 역할을 한다. 네그리는 보편적인 것을 근대의 산물로 보며 특이성(singularity)에 의해서 대체되어야 할 대상으로 본다, 그가 보편적인 것의 예로 직접 든 것은 ‘인간성’, ‘권리’, ‘법’, ‘유적 존재’(Gattungswesen) 등이다. 이에 대해서는 Antonio Negri, Antonio Negri, Art et Multitude : Neuf Lettres sur L'art (Paris : EPEL 2005). 22면 참조. 이하 이 책의 이름은 Art et Multitude로 줄이며 우리말로는 『예술과 다중』으로 옮길 것이다. 예술에 대한 네그리의 견해가 담긴 이 책은 1988년에 쓴 7편의 편지와 1999년과 2001년에 쓴 편지 그리고 1988년의 편지들을 소개하는 짧은 글 하나로 구성되어 있다.


5) 네그리는 20세기가 1917년에 시작되어 1968년에 끝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짧은 세기”이다.


6) 이 양자가 겹치는 묘한 시기라는 점에서 그는 이 시기를 이행기라고 부르며 ‘정치공백기’(interregnum)라고 부르기도 한다.


7) 책이나 그림처럼 생산물이 존재하지만 그 사용가치가 물질적인 데 있지는 않은 경우도 있고, 교사들의 교습, 음악연주, 돌봄노동 등의 경우처럼 생산물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에 대해서는 정남영,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와 탈자본주의의 전망」, 『21세기 자본주의와 대안적 세계화』 (문화과학, 2007) 참조.


8) Antonio Negri, The Porcelain Workshop : For a New Grammar of Politics, trans. Noura Wedell (Los Angeles : Semiotexte(e), 2008) 20면. 이하 이 책은 The Porcelain Workshop으로 줄여서 표기하며 우리말로는 『도자기공장』으로 옮길 것이다.  


9) 가치법칙의 붕괴에 대해서는 정남영, 「법칙, 가치법칙, 과학」, 『진보평론』 2007년 겨울호 참조. 자본의 일반적 한계 혹은 자기지양에 관한 논의는 『그룬트릿세』의 여러 곳에 나오며 『자본론』 3권의 15장에 집중적으로 나온다.


10) 예컨대, 예전에는 일정한 모양으로 직접 쇠를 깎는 훈련을 하던 공고의 학생들이 이제는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통해서 쇠를 깎게 되는데, 전에는 쇠를 깎는 숙련도가 중요했지만, 이제 숙련도는 기계에 맡겨지고 어떤 형상으로 깎느냐를 상상하는 지적인 노력이 중심적으로 된다. ‘숙련’을 예술성의 핵심으로 보는 관점에서는 달리 보이겠지만, 네그리의 입장에서는 노동의 성격의 이러한 변화가 노동에 예술적 창조의 성격을 부여하게 된다. 노동과 예술의 관계에 대한 네그리의 견해에 대해서는 나중에 집중적으로 논의할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무엇보다도 사유가 부재하는 곳에서 세련된 숙련을 요구하지 말 것을 제안하며, 숙련의 완전함에 대한 요구를 예술에 대한 완전한 몰이해의 표시로 본 러스킨의 관점을 원용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러스킨의 견해에 대해서는 『베네치아의 돌들』(The Stones of Venice)의 고딕 예술 부분을 참조하라.


11) Michel Foucault, The Birth of Biopolitics : Lectures at the College De France 1978-79, ed. Michel Senellart, trans. Graham Burchell (New York : Macmillan 2008), 317면.


12) In Praise, 146면.


13) Cesare Casarino and Antonio Negri, In Praise of the Common : a Conversation on Philosophy and Politics (Minneapolis, London :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08) 148면. 이하 In Praise 로 줄이며 우리말로는 『공통적인 것을 찬양하며』로 옮길 것이다.


14) 네그리는 「통제사회에 대한 후기」에서 들뢰즈가 푸꼬를 다시 다듬은 것을 여과기로 삼아서 삶정치 개념을 다시 다듬은 것이냐는 물음에 “물론, 그렇다”라고 선뜻 답하고 있다. In Praise, 136면.


15) The Porcelain Workshop, 30면.


16) 『도자기공장』의 서두에서 네그리는 전혀 다른 사상가들인  베버, 슈미트, 레닌에게서 초월적 권력 개념이 상동성(homology)을 띠고 나타남을 주목한다. 지키려는 사람이나 부수려는 사람이나 동일한 대상과 관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정치적 행동들은 양자택일―다른 권력이냐 아니면 무정부 상태 혹은 삶의 부정이냐―의 막다른 골목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네그리의 생각이다. “해방 개념이 권력 개념에 꽉 물려있는 것이다.” The Porcelain Workshop, 18면.


17) The Porcelain Workshop, 18면.


18) 이탈리아어로 ‘활력’은 ‘potenza’로, ‘권력’은 ‘potere’로 표기된다. 영어로는 ‘활력’과 ‘권력’이 동일하게 ‘power’로 표시된다. 구분을 위해 후자를 대문자 P의 ‘Power’로 표시하기도 한다. 역자에 따라서, 혹은 경우에 따라서 ‘활력’을 ‘potency’나 ‘potentiality’로 나타내는 경우도 있다. 불어로는 ‘활력’은 ‘puissance’로, ‘권력’은 ‘pouvoir’로표기된다. 라틴어로는 ‘활력’은 ‘potentia’로, ‘권력’은 ‘potestas’로 표기된다.


19) In Praise, 149면.


20) 네그리가 조로아스터적인 선과 악의 대립이라는 어구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경우에 악이란 어떤 실체가 아니라 활력의 부재 혹은 활력에 가해지는 한계이다. In Praise, 150면 참조.


21) 맑스가 ‘슬픈 유몰론’이라고 부른 것이라고 네그리는 말한다.


22) The Porcelain Workshop, 33면.


23) The Porcelain Workshop, 33-34면.


24) 같은 책, 34면.


25) 과거 젊은 청년들이 사회적 불의에 대한 대항으로 자신의 생명을 바쳤을 때 종교계 등등의 고결하신 분들이 ‘생명경시의 풍조’를 한탄했던 적이 있었다. 과거 민주화 투쟁에 헌신했던 한 작가도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고 보수적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외치기도 했다. 그런데 진정으로 삶의 활력의 편에 서있던 사람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전태일의 행동은 과연 죽음정치적 행동이었던가?


26) 네그리는 삶에 대한 이러한 견해를 푸꼬 및 들뢰즈와 공유하는 것으로 본다.


27) 모든 객체적인 것들은 주체성에 귀속된다.


28) The Porcelain Workshop, 34면.


29) 이는 『윤리학』을 집필하는 사이에, 정확하게는 1, 2부를 쓰고 나머지 부분을 쓰기 전에 『신학정치론』(Theologico-Political Treatise)을 쓰면서 일어났다고 한다.


30) 그 결과가 감옥에서 집필한 『야만의 별종』(L'anomalia selvaggia: Saggio su potere e potenza in Baruch Spinoza, 1981)이다. (영역본의 제목에 대해서는 다음 주석을 참조하라.) 이 책은 그가 감옥에서 집필한 또 다른 저서인 『시간의 구성』(Macchina Tempo: Rompicapi liberazione costituzione)과 함께 네그리 자신의 철학적 전환점을 이루게 된다. 전환의 내용은 존재를 구성하는 힘(활력)의 관점에서 맑스주의를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그 이전의 네그리는 국가의 파괴라는 측면에 갇혀 있었다고 보면 된다.


31) 이하의 논의에 대해서는 Antonio Negri, The Savage Anomaly : the Power of Spinoza's Metaphysics and Politics, trans. Michael Hardt (Minneapolis and Oxford :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1) 5장 1절 「상상과 구성」 참조.


32) 이 단계에서는 종교적 소외와 신학적 신비화가 비판된다.


33) 신비화가 역사적으로 효력을 발하고 예언이 정치체제의 틀이 된다.


34) 상상(력)이 역사적으로 구성적인 기능을 하게 된다.


35) 이것을 네그리는 새로운 자연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앞의 인용문에서처럼 제2, 제3, 제n의 자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36) The Savage Anomaly, 97-98면.


37) In Praise,  77-78면.


38) 4부 1장의 논의를 참조하라.


39) ‘정’에서 ‘반’으로의 이행이 ‘부정’이고, ‘반’에서 ‘합’으로의 이행이 ‘부정의 부정’이다.


40) 이하 마이클 하트 지음, 박서현 외 옮김, 『네그리 사상의 진화』 2장 후반부의 논의 참조.


41) 이 용어들은 베이컨(Francis Bacon)의 『새로운 도구』(Novum Organum)에서 빌려온 것이다.


42) “자네가 이 장소에 도달하지 않았던 것은 자네 또한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존재의 의미를, 공허로 향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Art et Multitude, 53면) 그러나 하이데거의 철학은 파괴가 함축하는 바의 근대적인 것의 말소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네그리는 그를 탈근대를 향해 열려진 것으로 본다. “하이데거는 단지 근대성의 운명을 예언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근대성을] 구분하면서 또한 반근대성을 향해 열려있는 경첩이다. 다시 말해, 존재론적으로 구성적인 방법으로 시간을 파악하는 개념화를 향해 열려있으며, 이런 개념화야말로 초월적인 것이 실체에 대해 갖는 헤게모니를 무너뜨린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힘에 대해 열려있다고 말할 수 있다.”(안또니오 네그리 지음, 이기웅 옮김, 『전복적 스피노자』(그린비 2005), 158면)


43) Art et Multitude, 54면.


44) 예컨대 『어려운 시절』(Hard Times)에서 그래드그라인드가 대표하는 공리주의적 풍조―그 뒤에는 모든 것을 교환가치로 환원하는 자본주의적 과정이 자리잡고 있다―는 마치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에서 모르기아나가 항아리 속의 도적들을 뜨거운 기름을 부어 죽이듯이 '상상력’을 압살하고 있는 것으로 제시된다. 특히 작가가 공리주의 교육을 받는 아이들에게서나 노동자들에게서나 공히 상상력이 억압되는 것을 가장 심각한 문제로 보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디킨즈의 이러한 진단은 영국의 장식예술을 (더 나아가 노동 자체를) 장인들(노동자들)에게 정해진 틀에 맞춘 숙련성만을 요구하고 상상에 기반을 둔 창안은 도외시하는 노예적 방식으로 본 러스킨의 진단과 통한다.


45) Art et Multitude, 49면.


46) Art et Multitude, 30면.


47) 물론 자본은 이것을 상품의 세계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전지구적인 규모로 인구의 삶을 포섭했다는 현대 자본주의에서도 실제로 삶의 풍부한 생산물들을 다 포획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48) 이탈리아어로 ‘excedenza’이다. 불어로는 ‘excédence’, 영어로는 보통 ‘excess’로 옮겨진다.


49) 초과의 생산이란 곧 새로운 존재의 구축이며 따라서 앞에서 말한 대로 상상력을 필연적으로 포함하게 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네그리는 아름다움을 “능동적 행위가 된 상상력”이라고도 부른다. Art et Multitude, 29면.


50) Art et Multitude, 30면.


51) Art et Multitude, 85면.


52) 한때 문학은 현실을 바꾸는 힘이 없는 한가로운 것으로 자주 간주되었다.


53) Art et Multitude, 85.


54) 우리가 여기서 상품화에 굴복한 사이비 예술가들에 대해서 말할 필요는 없다. “예술은 자본주의의 권력을 용인할 수 없지. 예술가가 자본주의의 권력을 용인한다는 것은 오직 그가 의식이 부족하고 그의 담론이 형용모순을 보여준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야.” Art et Multitude, 85면.


55) Art et Multitude, 76면, 네그리가 정치적인 의미의 전위―예컨대 레닌이라는 이름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 를 보는 시각도 이와 연관하여 주목할 만하다. 네그리는 1917년의 레닌적 전위나 이른바 케인즈 시대(복지국가)의 대중적 전위는 1968년 이후의 현실에는 적절하지 못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전위의 긍정적 측면을 프롤레타리아 전체가 가진 잠재적 가능성을 앞서서 구현하는 데서 본다. (부정적 측면은 주지하다시파 프롤레타리아의 일부가 다른 부분에 대해서 위계적인 우위를 가짐으로써 민주주의에 결함을 가져오는 것이다.) 1968년 이후 즉 탈근대의 시기에 ‘전위’라는 개념이 적절하지 못하게 된 이유는, 이제는 프롤레타리아 즉 다중의 어느 부분도 다른 부분에 대해서 특별한 정치적 우위를 갖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56) 한국에서 90년대 이후 특히 문학분야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 쇠퇴 현상을 한탄하는 담론은 이러한 향수 혹은 절망의 한 양태이다. 반대로 문학의 상대적 쇠퇴를 다른 예술영역 혹은 문화 영역과의 경쟁관계 혹은 유행적으로 대체되는 관계로 보는 태도 역시 네그리의 것과는 거리가 멀다.


57) Art et Multitude, 69면.


58) Art et Multitude, 12면.


59) 맑스는 이 단계를 “사물이 할 수 있는 것을 인간이 하는 식의 노동이 종식된 단계”라고 말하기도 했다. Karl Marx, Grundrisse: Foundations of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Rough Draught), Trans. by Martin Nicolaus (Harmondsworth: Penguin Books, 1993), 325면.


60) 경계붕괴를 과거와 같은 의미의 예술작품이―소설이, 회화가―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는 말로 이해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61) 이에 대해서는 맑스의 『독일이데올로기』에서의 논의(Marx Engels Collected Works vol. 5, 67면)를 참조하라. 거기서 맑스는 이러한 연결성을 ‘Verkehr’라고 부른다. 영역자들은 이를 ‘intercourse’ 혹은 ‘commerce’라고 옮긴다. 우리는 인터넷의 존재로 인하여 연결성이 고도화된 조건을 감각적으로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인터넷은 그것을 만든 동기 자체가 어느 한 곳이 파괴되더라도 전체적으로 정보를 보존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62) Grundrisse: Foundations of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 712면.


63) The Porcelain Workshop, 143면 참조.


64) 네그리의 이러한 생각은 조금 지나치게 보일 수도 있다. 들뢰즈․가따리의 예술론이 제시되는 『천 개의 고원』 11장 같은 곳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특이한 것들의 연결이 공재의 평면(the plane of consistency)을 그리면서 살아있는 추상기계―이전에는 없었던 것이다―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들뢰즈․가따리가 이를 명시적인 정치론적 논의로 발전시키지 않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65) In Praise, 118-19면 참조.


66) Art et Multitude, 12면.


67) Art et Multitude, 24면.


68) Art et Multitude, 24면.


69) 마이클 하트, 안또니오 네그리 지음, 조정환 외 옮김, 『다중』(세종서적 2008) 249면 참조.


70) 말하자면, 노동자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계급의식 같은 것.


71) In Praise, 126-27면.


72) In Praise, 127면.


73) The Porcelain Workshop, 144면.


74) 안또니오 네그리 지음, 정남영 옮김 『혁명의 시간』(갈무리 2004), 49-50면.


75) 네그리에게 계급투쟁이란 두 집단이 이익을 놓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위대한 실험”으로 이해된다. ‘사랑’은 특이성들을 공통적인 것으로 묶어서 새로운 존재를 구성하는 데 작용하는 원리이다.


76) Art et Multitude, 54면.


77) Art et Multitude, 62면.


78) 네그리가 “어느 쪽이든 간에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은, 문화적 논쟁이 죽음 쪽으로, 의미의 근원적인 결여, 공허, 절대적인 차이부재 쪽으로 무자비하게 엇나가고 있다는 것이야”(Art et Multitude, 45면)라고 말했을 때 그는 바로 삶문화의 입장에서 진단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79) Art et Multitude, 76면


80) Art et Multitude, 77면


81) 오스트리아의 전위적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페터 한트케(Peter Handke)를 말한다.


82) Art et Multitude, 78면


83) Art et Multitude, 8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