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여는작가』 2006년 여름호 (통권 제43호) 기고문
다중과 삶문학
언어는 더 이상 표현의 형식일 뿐인 것이 아니다. 언어는 인간적인 것과 그 환경을 생산하는 유일한 형식이다. 이렇듯 언어는 공통적 존재의 존재양태이다. (안또니오 네그리)
정남영
1. 글머리에 ― 삶문학론과 탈근대
몇 달 전 출판된 자신의 평론집 총론에서 조정환은 그간의 자신의 모색들을 갈무리하면서, 90년대 이후의 달라진 세계에 부응하는 것으로서 ‘삶문학론’을 본격적으로 제시하였다. 이는 자신이 주장했던 ‘민주주의 민족문학론’과 ‘노동해방 문학론’을 비판하면서, 또한 90년대 이후에도 80년대의 여러 논자들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빠져나간 상태에서도 논쟁이 비교적 꾸준히 이루어진 리얼리즘론과 모더니즘론을 모두 비판하면서 이루어진 것이기에 특별한 주목에 값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삶문학론이란 이름은 너무나도 뻔해 보이고 그런 만큼이나 내용없고 무정치적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는 자문한다. “왜, 저 오래된 용어인 ‘문학’에 하필이면 낡고 낡아서 상투화된 용어인 ‘삶’을 갖다 붙인 이름일까? 문학이 이제 민주주의나 민족이나 노동해방 등과는 무관하다는 의미인가?”1)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삶은 늘 이들 ‘현실적으로 정치적인 것들’이 기초해 있는 근거였다. 바로 삶으로부터 이 현실적으로 정치적인 것들의 의미가 발생해 오지 않았던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삶은 현실적으로 정치적인 것을 규정하는 외부로, 빈칸으로, 예외로 실재해 왔다. 이런 의미에서 삶은 ‘잠재적으로 정치적인 것’이었다. 1990년대의 새로움은 (그것이 어떤 수준에서 파악되는 것이건) 잠재적으로 정치적인 것이었던 삶의 펼침과 접힘의 운동과 결부되어 있다.2)
그렇다면 ‘삶’의 핵심성에 대한 이해는 사고방식의 주요한 전환, 현실성(actuality)을 중심으로 삼는 사고에서 잠재성(virtuality)을 중심으로 삼는 사유로의 전환을 전제로 한다.3) 이에 따라 예컨대 그가 한때 주장하였던 노동해방 문학론은 이제 “실재로서의 삶을 현실성의 차원으로 환원”한 것으로서 비판된다.4)
조정환으로 하여금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대립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 양자 모두의 한계를 보게 하는 것도 삶의 잠재성 차원에의 주목이다. 조정환은 리얼리즘론과 모더니즘론 사이의 차이―당파성인가 진정성인가, 민중성인가 개인성인가, 객관적 현실성인가 내면성인가, 총체성인가 그것의 거부인가 등의 대립논점들로 나타난다―보다는 이 둘이 “근대화와 모더니즘의 변증법 혹은 근대쟁취와 근대극복의 변증법이라는 공동의 방법론에 따라 움직여 왔으며 사실주의적 재현을 넘어선다는 공동의 목표를 갖고 있”었으나 “잠재성의 힘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는 공동으로 거리를 취한다”5)는 데 더 주목한다. 이렇듯 잠재성의 포착에 미치지 못했다는 점에서 리얼리즘론과 모더니즘론의 노력들은 모두 결국 근대성에서 온전하게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이제 삶문학론은 현실성이 아니라 잠재성을, 근대의 크로노스적 시간이 아니라 카이로스의 시간을, 민중이나 개인이 아니라 다중(multitude)을, 재현이 아니라 표현을 대안적인 이름들(개념들)로 제시한다. 그리하여 1990년대 이후의 세계는 ‘민중’의 시대나 ‘폐허’의 시대가 아니라 “문학의 지적 정동적 사랑에 의해 다중의 색다른 탈근대성의 형상이 창안되고 있는 삶문학의 실험실”이며6) “문학의 잠재력의 실현이 곧 삶의 안보, 삶의 건강의 실현과 같은 궤도에 놓인 시대, 그래서 문학의 해방과 삶의 안보 및 자기가치화의 문제가 서로 겹쳐지는 시대”로 파악되는 것이다.7)
조정환의 삶문학론은 나 자신이 일련의 글들을 통하여8) 나름대로 진행해온 모색을 훌륭하게 수렴하고 있다. 이제 나는 이 글에서 다중이라는 주체적 형상이 가진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이 언어 그리고 문학의 잠재적 활력과 아무런 매개 없이 직결되어 있음을 집중적으로 밝혀봄으로써 ‘삶문학의 실험’에 조그만 기여를 하고자 한다.
2. 탈근대와 다중
역사적 조건의 차이를 사상하고 보자면, 다중은 삶의 자유로운 영위자로서, 삶의 외부로부터 삶에 부과되는 강제들과 초월적 가치들에 맞서고 그때그때마다 새로운 삶을 여는 집단적 주체성의 형상을 지칭한다. 이러한 의미의 다중은 태곳적부터 잠재적으로 존재해왔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네그리와 하트는 영원의 관점에서 본 다중이라고 부른다.9)) 그러나 이 글의 직접적 관심사는 이러한 의미의 다중이 아니다. 우리의 관심은, 탈근대의 시기에 역사의 지평에 실재적 가능성으로서 등장하였으며, 앞으로 기획되고 구성되어야 할 집단으로서의 다중이다. 이러한 의미의 다중은 당연하게도 탈근대적 조건과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 따라서 다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대에서 탈근대로의 이행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20세기의 후반부에 자본주의 세계체계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을 경험적으로 혹은 각종 출판물들이나 미디어를 통해서 확인하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10) 그런데 이 변화를 바라보는 관점은 다양하다. 모든 사회적 갈등이 사라진 시대가 오고 있다고 보는 이들도 있고, 갈등은 존재하지만 계급적인 성격의 것은 아니라고 보는 이들도 있으며, 민족, 민중, 노동계급, 당, 제국주의 등의 범주들이 타당하게 적용될 수 있는 사회적 갈등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다중이라는 새로운 주체성을 읽어내는 입장에서는 이와는 다른 식의 읽기를 한다. 자본주의가 새로운 단계―자본의 외부가 사라지고 지구의 삶 전체가 자본에 포섭된 단계―에 진입한 것으로 보지만, 그것이 여전히 자본주의인 한 착취와 억압이 존재한다고 본다. 다만, 착취와 억압의 주요한 방식이 바뀌었으며, 이와 동시에 비물질적 노동과11) 분산된 네트워크적 생산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생산방식이 다중이라는 새로운 인간해방의 주체성을 가능하게 한 것으로 본다.
과거의 주요한 문학론들이 계급적 현실에 크게 주목하였음을 감안할 때 다중을 계급성의 측면에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듯하다. 만일 계급이 자본과의 관계 속에서 설정된다면, 다중이 계급적이지 않을 이유는 아무 데도 없다. 다중은 자본의 포섭의 확대 및 변화에 의해 창출된 주체성으로서 자본과 권력의 직접적인 지배 아래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중에 계급이라는 말을 적용하자면 이때 ‘계급’은 전통적인 의미의 계급과는 다르게 파악된 것이어야 할 것이다. 전통적으로 경제적 계급에 대한 이론들은 계급을 동일성의 관점에서 파악하거나(동일한 이념과 이해관계를 가진 개인들의 집합) 아니면 복수성(複數性)의 관점에서 파악해왔다(다양한 개인들의 집합). 다중이 함축하는 계급 개념은 이렇게 양자택일적인 접근법을 취하지 않는다. 다중은 서로 차이가 나는 다양한 활력들이 공통적인 것을 형성하여 이루는 집단이라는 점에서 통일성과 복수성을 모두 포함한다.
다중의 이러한 성격은 다중이 탈근대의 생산이 가진 분산된 네트워크 형태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결합되는 집단이라는 데서 연유한다. 네트워크 방식의 연합에서는 연결되는 점들이 어떤 중심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서로 상호작용하고 협동하면서 공통적인 것을 만들어낸다.12) 다중은 이와 같이 상호협동을 통해서 공통적인 것을 창출하며, 다시 이 공통적인 것을 기반으로 하여 행동하면서 새롭고 특이한 것을 함께 창조한다. 이런 의미에서 다중의 정치는 차이들의 연합과 연결이지만 이른바 ‘차이의 정치’와는 다르며,13) 전통적인 좌파의 중앙집중화된 정치와도 다르다. “근대적 정체성들의 파열이 있다고 해서 특이성들(singularities)이 공통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다중은 공동으로 행동하는 특이성들이다. 특이성과 공통성(commonality) 사이에 개념적 혹은 실재적 모순이 없다는 사실이 이 개념의 열쇠이다.”14)
다중 내부에서 그 구성요소들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은 오로지 절대적 민주주의 말고는 없다. 근대적 노동계급은 배제에 기반을 둔 제한된 개념이었다. 좁은 의미로 파악되는 경우에는 비(非)산업노동자들을 배제하고, 넓은 의미로 파악되는 경우에는 비(非)임금노동자들을 배제한다. 이러한 배제는 노동 사이에―예컨대 남성노동과 여성노동, 산업노동과 농업노동, 고용노동과 비고용노동, 노동자들과 빈민 사이에― 종류의 차이가 있다는 생각에 기반을 둔다. 이것이 과거에 어떠했든 지금은 타당하지 않다는 데 다중 개념이 기반을 둔다. “노동의 형태들 사이에 정치적 우열은 없다. 모든 노동들은 오늘날 사회적으로 생산적이며, 공통적으로 생산하고 자본의 지배에 저항하는 공통의 잠재력을 갖는다.”15)
다중은 그 삶 자체가 자본에 포섭된 상태인 한편, 반대로 그 삶 자체가 자본과의 싸움의 터전이다. 다중은 삶의 형태를 놓고 자본 및 전지구적 권력과 싸운다.16)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서 다중이 움직이는 정치적 지형은 과거 근대적 의미의 ‘정치’의 지형과 다르다. 우선 탈근대에서는 삶 전체의 자본에의 포섭에 상응하여 권력 자체가 삶권력(biopower)으로 전화하였다.17) 예를 들어 90년대 이후 대학생들의 압도적 다수가 (80년대와는 너무나도 다르게) 자신의 대학생활을 취직을 위한 준비로서 기꺼이 혹은 무심코 정의할 때, 이들은 의식하고 있든 아니든 삶권력의 지배 아래 놓여있는 것이다. 이렇게 삶권력과의 싸움이 벌어지는 지형이 바로 삶정치적 지형이다. 다중의 정치는 바로 삶정치이다.
마지막으로 다중은 결코 완료된 집단이 아님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손가락으로 지시할 수 있는 장소에 손가락으로 지시할 수 있는 형태로 존재하는 집단, 윤곽이 고정되어 뚜렷한 집단이 아닌 것이다. 다중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차이들, 잠재력들, 소수적인 것들의 연합과 접속의 과정 혹은 구성의 과정이며 그 양식”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18). 다중은 무정형이다.19) 이런 의미에서 다중이란 늘 새로워지는 과정적 존재이며, 언제나 미완인 존재[not-yet multitude]이다.20) 따라서 다중은 통계의 차원에서 접근될 수 없고 오로지 “아까와는 다른 시간”(김수영, 「꽃잎 (二)」)을 창출하는 ‘사건’의 차원에서만 접근될 수 있다. ‘사건’이란 미디어들이 탐욕스럽게 쫓아다니는 선정적 경험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개념, 범주, 법칙들로 파악되지 않는 새로움 즉 특이성의 생성을 말한다.
다중이 완료된 집단이 아니라 함은 그 구성요소들 역시 고정되고 완료된 정체성들, 인격들 등이 아님을 말한다. 스스로를 혁신할 수 있는 특이한 활력들 즉 특이성들이다. 이는 다중을 구성하는 요소들 자체가 이미 하나의 다중적 존재라는 말과 같다. 특이성 자체가 이미 다중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특이성들은 인격 혹은 개인 이전의 것들로서 나타날 수도 있고 인격 혹은 개인 너머에서 배치되는 것들로 나타날 수도 있다.
4. 다중, 잠재성, 특이성
다중이 미완의 존재라는 말은 다중이 현실성이 아니라 잠재성의 차원에서 존재하는 집단이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대적 사고방식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근대적 사고방식은 자본 및 국가와의 공모 속에서 삶을 거대한 ‘현실성’의 감옥 속에 가두었다. (이 근대적 사고방식의 가장 노골적이고 대표적인 형태가 공리주의이다.) 이 감옥에서는 이미 현실화된 것(the actualized)이 실재의 유일한 근거이며,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는 잠재적 활력(맑스의 경우에는 ‘산 노동’)은 그 활력에 의해 창조된 것(맑스의 ‘죽은 노동’ 즉 자본)에 종속되어, 그것과 등가관계로 계산된다. 그리하여 잠재성의 차원을 박탈한 존재는 눈금이 그어진, 측량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가장 상위의 공인측량사는 국가이다.
현실성에의 매몰은 좌ㆍ우파를 막론하고 일어났다. 현실을 근본적으로 바꾼다는 혁명론들조차도 대부분 근대의 족쇄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아서 국가권력의 탈취 혹은 구성을 그 목적으로 삼고, 국가 주도의 산업화(죽은 노동의 축적)를 진행시키는 데 아무런 주저함이 없었다. 운동의 성패는 현실성 차원에서의 결과(권력, 이익, 더 많은 임금, 더 좋은 제도, 더 많은 권리)를 기준으로 평가되었으며, 결국 모든 운동은 현실화의 수로로 한데 몰려 배수되어 사라지는 운명을 겪기 쉬었다. 만일 잠재성의 중요성이 제시된다고 하더라도 이는 ‘주관성’에 대한 강조로 이해되기 십상이었다.
잠재성을 다시 복구하려는 철학적 노력의 계보가 존재하지만, 철학적 논의를 조회해야만 잠재성을 알게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문학작품은 물론이고 우리의 일상적 언어생활조차도 그 진정한 바탕은 바로 이 잠재성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우리가 서로 말을 주고받을 당시에는 현실성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러나 잠재성의 차원에서는 아주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며 이 사건들 중 일부는 나중에 현실화된다.21) 그러나 현실성의 감옥에 갇힌 사람에게는 이것이 보이지 않는다. 찰스 디킨즈의 소설 『어려운 시절』(Hard Times)에 나오는 공리주의자 그래드그라인드(Gradgrind)가 상상력과 함께 모든 예술적인 것을 (요즘이라면 ‘실용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거부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가 대변하는 사고방식은 잠재성을 실재로서 인정하지 않으며 현실화된 것보다 앞서 가는 그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고, 수량화된 현실적 가치 말고 다른 어떤 가치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가 보기에 가장 앞서 가는 것은 가장 강력하게 현실화된 것 즉 자본과 국가이다.
예술(문학)작품은 잠재성이 잠재성 그 자체로 실재의 일부로 구현된 것이다. 따라서 문학의 힘은 이미 현실화된 과정을 ‘재현’하는 데보다는 잠재성의 발현 자체에 있다. 이는 “전례없는, 예상치 못하고 생각하지 못한 존재의 질을 생성”하는 것22), 혹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 아직 구현되지 않은 것...에 대한 예감을 인간에게 형성시키는”23) 것으로 나타난다. 요컨대, 잠재성의 발현 즉 표현은 곧 특이성의 생성으로 나타난다.
특이성이 생성을 로렌스의 세잔론을 통해 설명해보기로 하자.24) 로렌스의 세잔론의 핵심은 세잔의 예술가로서의 특이한 활력이 모델에게 있는 특이한 활력과 조우하여 ‘사과스러움’(appleyness)으로 작품에 구현된 것을 포착한 데 있다.25) 여기서 로렌스가 말하고 있는 것은 ‘이전에 있었던 것의 재현’이 아니다. 이는 그가 말하는 ‘사과스러움’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 아직 구현되지 않은 것을 지칭한다는 점으로 보아서 명백하다. “예술가로서 그[세잔―정남영]는, 그녀에게 있어서 오늘날 기성의 상태를 벗어날 수 있고 이미 알려진 상투형의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부분은 바로 사과스런 부분(appley part)임을 알고 있었다.”26) 사과스러움은 재현의 관점에서 접근되지 않는다.
그를 흉내내는 사람들은 양철처럼 접힌 식탁보 같은 부속물들―그의 그림에서 비현실적인 부분들―을 흉내낸다. 그러나 꽃병들과 사과들을 흉내내지는 못한다.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정한 사과스러움이다. 사과스러움을 흉내낼 수는 없다. 각자 자기로부터 새로이 그리고 다르게 창조해야 한다. 새로이 그리고 다르게. 세잔“처럼” 보이는 순간,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27)
이것이 바로 ‘특이성’이다.28)
실상 실제비평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작품에서 일어난 이러한 존재의 새로운 질의 창조, 즉 특이성의 생성을 밝히는 일은 그렇게 쉽지가 않다. 로렌스의 세잔론은 이러한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데 좋은 본보기가 된다. 로렌스는 세잔을 평함에 있어서 그 형식적 요소들이나 기법의 측면에 주목하지도 않고29) 또 (당연하게도) 어떤 대상을 그렸는가(재현했는가)에 집중하지도 않는다. 우선 로렌스는 세잔이 예술가로서 행했던 치열한 싸움에 주목한다. “습관화된 기억들”에 다름 아닌 “상투형들”(cliches)과의 싸움, 혹은 상투형들의 새로운 배열과의 싸움이다. 습관화된 기억은 경험을 이미 존재했던 것으로 되돌리며, 그럼으로써 일련의 경험들에 동일성(닮음)의 외피를 씌운다.
그러나 이 싸움은 특이성의 창조의 조건은 되겠지만 창조 자체는 아니다. 세잔에게 있어서는 사과스러움의 구현에 이르러서 비로소 특이성을 창조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로렌스는 세잔이 성공을 거둔 사례가 많다고 보지는 않는다. 많은 경우 상투형에 아직 머물러 있거나, 아니면 상투형의 파괴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로렌스는 사과스러움의 구현에 성공한 몇 안되는 작품들에서 혁명을 보며 따라서 그에게 세잔은 “순수한 혁명가”이다. 이것은 결코 비유가 아니다. 말 그대로 ‘혁명’인 것이다.
그가 그의 모델들에게 “사과가 되시오! 사과가 되시오!”라고 말했을 때 그는 예수회 및 기독교 관념론자들 전부의 몰락만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 방식 전체의 몰락,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의 대체에 서언을 붙이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세잔에게 있어서처럼 무엇보다도 사과가 된다면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갖게 되는 것이다....30)
로렌스는 여기서 바로 삶정치적 차원에서의 혁명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5. 다중과 언어
로렌스의 세잔론은 회화에 관한 비평이지만, 문학에 적용되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로렌스가 말하는 상투형은 회화에서만큼이나 언어에서도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언어의 경우에는, 그것도 탈근대에서는 문제가 더 복잡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단지 “습관화된 기억들”만이 아니라 권력이 의도적으로 주조한 상투형들도 등장하며, 이것과의 싸움은 일종의 계급투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언어에서 일어나는 계급투쟁에 관해서는 이미 바흐찐이 탁월하게 통찰한 바 있다. 따라서 탈근대 이전에 이와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은 적절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탈근대에 들어와서 이것이 더욱 전면적으로 되고 핵심적으로 된다는 말이다. 이는 탈근대적 주체성의 성격과 깊은 연관을 갖는다.
앞에서 말했듯이 탈근대의 주체성은 네트워크적 주체성이다. 이는 지식, 소통, 그리고 언어를 통하여 주로 작동한다. 그리고 이제는 지성(知性, intelligence)도 특출한 개인이나 아니면 당과 같은 전위집단에 집중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의 형태를 띤다.31) 그리하여 “만일 소통이 점증적으로 생산의 날줄과 씨줄이 되었다면 그리고 언어적 협동이 점증적으로 생산적 몸체의 구조가 되었다면, 언어감각, 의미 및 소통네트워크들에 대한 통제는 점점 더 정치투쟁의 중심적 이슈가 된다.”32)
따라서 이제 자본은 (그리고 그와 함께 권력은) 언어를 장악하지 않고서는 그 지배를 유지하기가 힘들게 되었다. 이와 같이 권력과 자본이 잠재적 영역, 혹은 버추얼한 영역을 지배하고 장악하는 것을 가따리는 “비물질적 실존공간의 사물화”33)라고 부른다(이하 ‘비물질적 사물화’로 줄인다). 인간의 정동(감정, affect), 정신, 꿈, 욕망을 삶의 바깥에 있는 초월적인 가치들과 척도들에 종속시킴으로써 삶이 삶으로서 살아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렇듯 언어는 공통적 삶의 거처인 동시에 비물질적 사물화와 맞서는 삶정치적 투쟁의 지형이 된다. 삶문학이란 바로 이 지형에서 움직인다.
전통적 의미의 사물화의 분쇄―계급의식의 각성―가 전통적인 형태의 자본주의와의 싸움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면 이제 탈근대에서는 비물질적 사물화의 분쇄가 마찬가지로 중요해진다. 그런데 이는 과거와의 유비만으로 잘 이해되지 않는다. 전통적인 의미의 사물화가 대상들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현상 즉 현실성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면 이제 비물질적 사물화는 잠재성의 영역에서 일어나는데, 잠재성의 영역은 바로 삶의 창조력의 거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통적인 의미의 사물화가 삶의 사후적 봉쇄였다면 비물질적 사물화는 삶의 힘의 원천봉쇄이다.
로렌스가 세잔에게서 두 가지 종류의 활동―상투형들과의 싸움과 특이성의 생성―을 보았다면 이제 탈근대에서 삶문학의 과제에는 여기에 비물질적 사물화와의 싸움이 더 추가될 수 있다. 그런데 상투형과 비물질적 사물화는 개념적으로만 구분될 뿐 실제로는 동일한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90년대 이후 부쩍 상승한 ‘국익’과 ‘애국,’ 언제나 지배해온 ‘국가,’ ‘경제,’ ‘발전,’ 역시 90년대 이후에 대두한 ‘구조조정’과 교육 분야에서 화려한 성가를 누리고 있는 ‘실용’과 ‘개혁,’ 이 밖에 초월적 가치들을 전달하는 다른 모든 이름들은 모두 자본과 권력에 의하여 “우리와 삶 사이에 완벽한 차단막처럼 끼어”넣어진34) 상투형들이 아닌가.
삶문학은 이러한 사물화 및 상투화에 맞서서 쉴새없이 특이성을 생성하며 현재를 혁신하는 문학이다. 김수영이 “「四月革命」이 끝나고 또 시작되면 / 끝나고 또 시작되면 끝나고 또 시작되는 것은 / 잿님이 할아버지가 상추씨, 아욱씨, 근대씨를 뿌린 다음에 / 호박씨, 배추씨, 무씨를 또 뿌리고 / 호박씨, 배추씨를 뿌린 다음에 / 시금치씨, 파씨를 또 뿌리고 / 석양에 비쳐 눈부신 / 일년 열두 달 쉬는 법이 없는 / 걸찍한 강변밭 같기도 할 것이니”(「가다오 나가다오」)라고 노래했을 때 이는 자연 속의 어떤 순환을 말한 것으로 이해되기보다 늘 새로워지는 삶(문학)의 원리를 말한 것으로, 또 (텍스트의 표면에 분명하게 전달되는 대로) 혁명 또한 이 원리의 정치적 발현에 다름 아님을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
나는 그동안 특이성을 생산하는 언어사용을 ‘시적 언어사용’이라고 불러왔다. 이는 기존의 정해진 의미를 그대로 전달하는 ‘산문적 언어사용’과 대조적으로 시적 맥락에서만 고유하게 존재하는 특이한 의미를 생성하는 언어사용 방식을 말한다.35) 나는 어떤 글에서는 이론적으로 또 어떤 글에서는 작품을 분석하면서 ‘시적 언어사용’을 설명하려고 하였다. 예컨대 「살아있는 언어, 살아있는 삶」에서는 시적 언어사용의 탁월한 사례로 신경림의 시 「農舞」를 비교적 상세히 분석하였다. 그 글에서 내가 나의 접근방식과 대조시키고자 한 것은, “생활의 땀냄새”라든가 “민중의 숨결”과 같은 어구로 이루어지는 접근방식이다. 이 어구들은 신경림의 많은 시들에 적용되어서 결코 틀렸다고 할 수 없는 무난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 자체만으로는, 다시 말해서 새로운 맥락을 이루어 새로운 의미를 얻지 못한다면, 이 시가 생성한 특이성을 포착하지는 못한다. 단지 「農舞」를 이 어구들이 적용되는 다른 많은 시들―신경림의 것이든 다른 시인의 것이든―과 한데 묶어―아마도 ‘농민시’ 혹은 ‘민중시’로―분류하는 효과를 가질 뿐이다. 이것이 불필요하다는 말은 아니다. 이 시가 창조한 특이성의 포착, 이 시를 삶문학으로서 접근하는 것과는 무관하다는 말이다. 「農舞」의 특이성에 접근하고자 하는 나에게는 이 어구들이 그 매력에도 불구하고 별로 필요하지 않았으며 그 대신 비교적 긴 분석의 과정이 필요했다. 이것은 ‘무난함’을 떠났다는 점에서 일종의 모험이었다. 하지만 특이성은 모험이 없이는 생성되지도 못하고 포착되지도 못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36)
6. 글을 맺으며 ― 삶문학과 다중
흥미로운 일이지만, 신경림의 시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잘 읽히기 때문에 (혹은 잘 읽힌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오히려 그 특이성이 간과되기 쉬운 것 같다. 독자들이 이미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범주 속에 신경림의 시들을 배치하기가 쉬어서인가? 반면에 김수영의 난해시와 같은 시들은 독자들의 이러한 접근을 애초에 상당한 정도로 봉쇄하는 효과를 갖는다. 그런데 여기서 또 난점이 생긴다. 김수영도 시의 새로움을 기준으로 진짜 난해시와 가짜 난해시를 구분해야 한다고 말했지만,37) 특이성의 생성과 단순한 참신함 즉 “상투형들의 새로운 모음, 습관화된 기억들의 새로운 배열”38)을 실제의 작품에서 구분하기가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은 작품읽기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39)
일반 이론적인 차원에서는 생각을 같이 하는 독자들과 평자들도 작품의 구체적인 대목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의 존재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차이들이 미리 만들어진 범주들과 개념들 안에 억지로 꾸겨 넣어지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작품에 대한, 차이가 나는 ‘감’(정동)들이 서로 연결되어 상호작용을 하면, 활력의 전이현상으로 인해서 상대적으로 낡은(이는 활력이 떨어진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감’들이 상대적으로 새로운 ‘감’들에 의해 새로이 충전되어 그 동안 넘지 못했던 문턱을 넘어서게 된다. 이러한 과정이 계속 진행되어 일정한 시점을 지나면 네트워크를 이룬 활력들 사이에 공통적인 것이 형성되게 되고 그것을 기반으로 연결된 활력들이 모두 함께 문턱을 넘어서는 단계, 그리고 그러한 ‘함께 넘어섬’이 계속 반복되는 단계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이는 다중이 형성되고 살아 움직이는 한 탁월한 사례가 될 것이다. 따라서 작품이라는 시냅스(synapse)를 통해 독자들의 다양한 활력들이 서로 연결되는 과정은 삶문학적 활동인 동시에 그 자체로 주요한 삶정치적 활동이 될 수 있다. 삶정치의 핵심은 권력이나 물질적 이익이 아니라 다중의 형성과 계속적인 자기혁신 및 확대이기 때문이다. ♠
1) 조정환, 『카이로스의 문학』(갈무리, 2006), 9쪽.
2) 같은 책, 같은 쪽.
3) 잠재성과 현실성은 실재(reality)를 구성하는 두 측면이다. 논자에 따라서 같은 개념에 대해 다른 단어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4) “노동해방 문학론은 현실공간 속에서 전개되는 공간화된 시간, 즉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에 묶여 있었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계기적 시간.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계기적 시간의 실체적 주체성으로, 일종의 동일성의 집합으로 이해되었다. 정치는 국가영역를 둘러싼 특수한 인간활동으로 파악되었고 당은 그 특수한 대의적 인간활동의 핵심 행위자로 파악되었다. 문학의 자리는 그래서 실재의 현실 차원―크로노스의 시간―양적 전체―양적 집합적 주체―국가적 대의정치를 잇는 선분 위에 설정되었다. 이른바 ‘현실정치’, 역사적 인간, 행동으로서의 실천, 공장이라는 장소, 노동자라는 집합주체, 목적으로서의 사회주의, 그리고 변증법이 문학을 운동으로 이해하도록 만들었고 문학은 오직 문학운동으로서만 존립 가능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같은 책, 10쪽.
5) 같은 책, 90, 91쪽.
6) 같은 책, 94쪽.
7) 같은 책, 10쪽.
8) 「바꾸는 일, 바뀌는 일, 그리고 문학」(『창작과비평』 96년 겨울), 「바꾸는 일, 바뀌는 일, 그리고 김수영의 시」(『실천문학』 98년 겨울), 「바꾸는 일, 바뀌는 일, 그리고 백무산의 시」 (『당대비평』 99년 여름), 「미, 인식, 윤리」(『내일을여는작가』, 99년 여름), 「살아있는 언어, 살아있는 삶」(『창작과비평』 99년 겨울), 「새로운 문학을 위하여」(『내일을여는작가』 00년 봄), 「시와 언어 그리고 리얼리즘」(『창작과비평』, 00년 겨울), 「언어적 다의성, 문학적 사유방식, 그리고 김수영의 「꽃잎(二)」」(『문예미학』 9호, 2002), 「형상과 그 너머: 시적 사유와 형상의 관계에 관하여」(『창작과비평』03년 가을) 등이다.
9) Michael Hardt and Antonio Negri, Multitude: War and Democracy in the Age of Empire (New York: The Penguin Press, 2004), 221쪽 참조. (앞으로 이 책의 제목은 Multitude로 줄임.)
10) 정보화, 탈산업화, 디지털화, 소비사회, 탈근대화, 재구조화, 구조조정, 신자유주의 등 여러 이름들이 이 변화를 지칭한다. 이 글에서는 이 변화된 시기를 지칭하는 가장 일반적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는 ‘탈근대’와 가장 널리 알려진 ‘정보화’를 주로 사용할 것이다.
11) 비물질적 노동에 관해서는 안또니오 네그리 등 지음, 조정환 등 옮김, 『비물질 노동과 다중』(갈무리, 2005) 참조.
12) 공통적인 것은 동일성 혹은 정체성(identity)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는 긴 설명을 필요로 하지만, 여기서는 언어의 살아있는 존재가 공통적인 것의 탁월한 사례라는 점을 언급하는 데 그치기로 하자. 언어에 대해서는 Multitude, 201쪽 참조. ‘공통적인 것’ 일반에 대해서는 같은 책, 147-48쪽 참조.
13) 차이의 정치 및 이에 입각하는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에 대한 비판으로는 Michael Hardt and Antonio Negri, Empire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2000), 139-43쪽 참조.
14) Multitude, 105쪽 참조. 네그리와 하트가 현재까지 나타난 투쟁들 중에서 다중이 전지구적 체제에 대항하여 벌인 최초의 저항이며 네트워크 모델의 가장 발전된 사례로 꼽는 것은 1999년의 씨애틀 투쟁이다. 같은 책, 286쪽 참조.
15) 같은 책, 106-7쪽.
16) 대추리 농민들의 투쟁은 그 가장 핵심적인 측면에서는 자신들이 원하는 삶의 형태를 지키기 위해 전지구적 권력 및 국가권력에 맞서는 싸움이다. 그러나 정부, 일부 언론, 일부 상인들, 일부 ‘국민들’은 이것을 ‘보상’ 등의 물질적 이익을 둘러싼 싸움으로 본다.
17) 삶권력은 네그리와 하트가 푸코의 개념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푸코는 인간의 몸에 작용하는 권력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주로 사용하였으나 네그리와 하트는 인간의 삶 전체에 작용하는 권력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다듬어냈다.
18) 조정환, 「민중이 없는 시대의 정치와 정치학」[『들뢰즈 맑스주의』 옮긴이 서문], 니콜래스 쏘번 지음, 조정환 옮김, 『들뢰즈 맑스주의』(갈무리, 2005), 25쪽.
19) 다중의 이런 성격을 네그리와 하트는 “아직 몸을 형성하지 않은 새로운 살, 무정형적 살”로 은유한다. Multitude, 158쪽.
20) Multitude, 104쪽 이하 참조.
21) 들뢰즈와 가따리는 이러한 잠재성 차원에서의 변화를 ‘비물질적 변형’(incorporeal transformation)이라고 부른 바 있다. Gilles Deleuze and Félix Guattari, A Thousand Platea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Trans. Brian Massumi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7), 80-81쪽 참조.
22) Felix Guattari, Chaosmosis: An Aesthetic Paradigm, Trans. Paul Bains and Julian Pefanis (1992; Bloomington & Indianapolis: Indiana UP, 1995), 106쪽.
23) F. R. Leavis, The Living Principle: 'English' as a Discipline of Thought (London: Chatto & Windus 1977), 44쪽.
24) 로렌스의 세잔론은 백낙청, 조정환 등 주요 논자들에 의하여 다루어진 바 있다. 백낙청은 「로렌스와 재현 및 (가상)현실 문제」(『안과밖』 창간호, 1996)에서, 그리고 조정환도 「카이로스의 시간과 삶문학」에서 로렌스의 세잔론을 주요하게 논의한다.
25) 로렌스는 ‘사과스러움’을 사과에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에게 존재하는 특이한 활력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한다.
26) D. H. Lawrence, Phoenix (London: William Heineman Ltd, 1936), 579쪽.
27) 같은 책, 580쪽.
28) 물론 로렌스가 ‘특이성’이란 단어나 개념을 사용한다는 말은 아니다.
29) 몰라서가 아니다. 그 자신 그림을 그리기도 했던 로렌스는 회화의 기법들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30) 같은 책, 578쪽.
31) 이에 근접하는 것으로서 가장 먼저 말해진 것은 맑스의 ‘일반지성’이다. 네그리는 이것을 이어받아 ‘다중지성’으로 발전시켰다. 우연찮게도 인간의 뇌에 관한 최근의 신경생물학적 연구는 개인의 뇌도 중앙집중화된 방식이 아니라 ‘다중’의 방식으로 작용함을 발견하고 있다. 다마시오(Antonio Damasio) 같은 이가 대표적이다.
32) Multitude, 404쪽.
33) Félix Guattatri, Chaosmosis: An Ethico-Aesthetic Paradigm, 103쪽.
34) D. H. Lawrence, Phoenix, 582쪽.
35) 이는 시와 산문의 장르적 차이와는 관계없이 모든 장르에 적용된다.
36) 무난함은 종종 ‘객관성’으로 이해되고, 모험은 자주 ‘주관성’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우리가 언제까지 주객의 이러한 따분한 이분법에 눌러앉아 있을 것인가?
37) 김수영, 「생활현실과 시」 참조.
38) D. H. Lawrence, Phoenix, 576쪽.
39) 지금은 시를 예로 들었지만 소설 같은 경우에는 문제가 더욱 복잡해질 수 있다. 리얼리즘론과 모더니즘론의 대립은 묘하게도 주로 소설에 대한 평가를 놓고 벌어지는 경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