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Prasie of the Common, 182~
[카사리노] [철학을 개념들을 생산하는 특수한 실천으로 보는 동시에 철학의 권리와 필요성을 긍정하는 들뢰즈와 가따리의 견해를 소개한 다음에 이렇게 질문한다.―정남영] “요컨대 특수한 지적 인물로서의 철학자에 대한, 그리고 특수한 실천으로서의 철학에 대한 이러한 유형의 성찰들이 당신에게 적절하거나 중요한지요?”
[네그리] “그렇게 확신하지는 못하겠습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많이 생각해왔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항상 철학을 취미로 간주해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당신의 물음에 답하는 극히 환원적이며 다소 바보 같은 방식임을 알고 있습니다. 어쨌든 나의 연구에 근본적이었던 분석도구들의 다수가 무엇보다도 철학적 맥락들 안에서 산출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은 항상 나에게 취미였습니다. 예를 들어서 나는 철학을 한 번도 가르쳐 본적이 없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내가 대학에 있을 때 나는 항상 운좋게도 철학을 안 가르쳐도 되었습니다.”
[카사리노] “철학 그 자체의 역사를 안 가르쳤다는 말입니까? 다른 수단으로 그리고 정치이론, 법이론, 정치경제 등의 다른 형태로 철학을 가르쳤다는 말입니까?”
[네그리] “그렇습니다. 나는 모든 종류의 것들을 가르쳤지만, 철학 그 자체를 가르쳐 본 적은 없습니다.”
[카사리노] “그러나 당신이 가르치면서 관여해 온 특수한 주제들이나 전문분야의 담론들과 무관하게 당신의 방법은 항상 철학적 방법이 아니었나요?”
[네그리] “필경 그럴 것입니다. 어떻든 나는 철학 그 자체를 가르쳐 본 적이 없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만일 가르친다면 매우 곤란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을 하는 것은 항상 직접적이고 즉각적이며 개인적인personal 요소를 포함합니다. 종종 자신의 가장 내밀한 요소들을 건드리는 형태의 수사(修辭)적 논증을 포함합니다. 이는 철학을 가르치고 논의할 때에 종종 개인화하는 수사를 사용함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나를 매우 불편하게 합니다. 어쩐 일인지, 나는 겸손함 혹은 내성적이거나 수줍은 느낌을 버리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오면서 공적인 철학자가 되어보려고 한 때가 몇 번 있었는데, 실패했습니다. 내가 과장을 했기 때문에 항상 실패였습니다. 나는 철학자의 역할을 하려고 너무 열심히 애를 썼던 것입니다. 이러한 실패들은 내 마음 속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철학은 나에게 취미인 동시에 상처였습니다. 어떻든 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이 시점에서 진정으로 끝난 하나의 철학 유형이 있다는 점입니다. 즉 근대 철학(modern philosophy), 근대의 철학(the philosophy of modernity)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철학을 더 가르치는 것은 하나도 의미가 없습니다.”
[카사리노] “정말로요? 나로서는 그 말을 받아들이기가 참 어렵네요. 특히 근대의 철학을 극히 잘 아는 사람에게서 그런 말이 나오니까요.”
[네그리] “가르치는 것은 유용하지 않지만, 물론 아는 것은 유용하지요! 다루어지고 가르쳐져야 하는 것은 다른 철학입니다. 즉 근대 속에서 생존해올 수 있었고 탈근대에서 다시 표면으로 부상한 유물론적 사유의 저 형태들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르네쌍스 철학을 세심하게 공부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이 철학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거나 더 이상 가르쳐지지 않습니다. 나에게 이 철학은 시의 한 형태로 읽힙니다. 나는 피치노(Ficino)와 물론 마키아벨리 같은 사람, 또한 루도비코 아리오스토(Ludovico Ariosto) 같은 사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카사리노] “어쨌든 르네쌍스 시대에는 철학과 문학 담론들 사이의 구분은 나중에 그런 것처럼 즉 즉 17세기 이후에서처럼 명료하거나 의미심장하지 않았죠.”
[네그리] “그렇습니다. 그것이 내가 르네쌍스 철학에 관심을 갖는, 그리고 그것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주된 이유입니다. 더욱이, 나라면 이 모든 문학적-철학적 자료들을 당시의 미술과 함께 가르치겠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내가 철학을 가르친다면 나는 그것을 전문분야적이고 기술적인 혹은 전문화된 담론으로서 가르치지 않겠습니다. 나는 그것을 과거를 발굴하는 방대하고 이질적인 공간으로서 여기겠습니다. 반면에 철학적 개념들에 관한 한 나는 매우 조심스럽고 분별력있는 태도를 취할 것입니다. 철학은 그 전통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특히 고전적인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전통―이는 헤겔에서 끝납니다―은 너무 오랫동안 사유를 노예로 만들었고 질식시켜왔기 때문에 우리는 더 볼 것도 없이 이를 제거해야 합니다. 변증법은 실재적인 그 어떤 것에도 상응하지 않습니다. 순전한 허위입니다. 중세신학의 제거가 근대 철학에게 중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변증법을 제거하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들뢰즈와 푸꼬 같은 인물들의―그리고 니체의 전통 일반의―가장 위대한 장점들 중 하나는 탈근대적이기 이전에 무엇보다도 반(反)근대적 전통을 구성했다는 것입니다. 근대 철학의 개념적 구조들을 파괴했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구조들 중에서 아마도 가장 뚫기 어려운 동시에 가장 해로운 것은 신학의 초월적인 것(the theological transcendent)과 칸트의 선험론적인 것(the Kantian transcendental)일 겁니다. 특히 선험론적인 것은―테까르트, 칸트, 훗설에 의하여 발전된 형태의 것―정말로 적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의 철학업(philosophical profession)은 선험론적인 것의 개념에 입각해 있습니다. 이것이 없다면 철학업은 존재하고 스스로를 재생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실로 이는 철학업이 이 개념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 타당성을 가능한 한 오래 옹호하는 주된 이유입니다. 예를 들어 지식의 모든 선험론적 요소들을 재창안함으로써 철학을 그로테스크하고 반동적인 신형이상학적 탐구로 전환시킨 비엔나 학파의 현대 후예들―즉 W. V. O. 콰인(Quine) 이후의 영미의 대학 철학자들―을 생각해 보세요. 현대의 논리학자들은 제쳐놓고, 다음과 같은 점이 적어도 데까르트 이래 극히 분명해졌습니다. 전문적 철학자가 자신을 사유의 매개자로 정립한 것입니다. 철학업의 사회적ㆍ정치적 기능은 결국 매개라는 것으로 귀결되었던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빠스깔과 스피노자가 이 기능을 완전히 거부하고 부정한 첫째 집단을 이룹니다. 그리고 맑스와 니체가 둘째 집단을 이룹니다."
[카사리노] “어떤 의미에서 당신은 도대체 철학이 왜 가르쳐지는지를, 왜 그것이 애초에 전문분야로서 그리고 제도적 지식으로서 형식화되는지를 설명한 셈이군요.”
[네그리] “그렇습니다. 이탈리아를 예를 들어보죠. 이탈리아가 탄생하자마자 특수하게 이탈리아적인 철학이 창안되어 정치적 갈등의 매개로서 이 부르주아적 국가체의 실존과 기능을 정당화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실제로 젠틸레(Gentile)가 철학과 철학사를 동시에 다소 처음부터 창안함으로써 한 일입니다. 그 철학과 철학사는 급속하게 이탈리아 전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 교과과정의 주요 요소가 되었습니다.”
[카사리노] “그러면 이제 우리는 당신이 자신을 전문적 철학자로서 보지 않는다고 보아도 문제가 없겠군요! 어떤 의미에서 당신은 또한 여기서 철학을 가르친다는 생각과 당신의 지적 기획을 화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이유를 설명한 셈입니다.”
[네그리] “그렇습니다. 나는 대학교의 전문분야로서의 철학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또한 개념들의 생산으로 이해된 바의 철학에도, 즉 들뢰즈와 가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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