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미문학교육의 과제와 번역의 문제


* 2008년 『안과밖』기고문


정남영(경원대)




나는 이 글에서 지난 20여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쳐온 경험을 돌이켜 보고자 한다. 사실 내가 해온 것을 이 글의 제목처럼 ‘영미문학교육’이라고 해야 정확할지 아니면 그냥 ‘영어교육’이라고 해야 더 정확할지 정하기가 어렵다. 둘 사이의 어중간한 것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문학교육과 언어교육은 결국 같은 뿌리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과 더 연관이 깊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언어를 실제 현실과의 살아있는 관계로부터 분리하여 일종의 속성 도구모음처럼 만든 ‘실용영어’ 이데올로기와 반대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살아있는 영어에 대한 감각과 인식의 획득과는 관계없는 지식으로 환원된 영문학교육과 반대되는 것이다.

 

이 글은 지난 교육경험을 단순히 제시하기보다는 그 경험에서 얻은 생각들을 일정한 이론적 형태의 제안으로 전환시켜 제시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러한 제시방식은 우연히 채택된 것이 아니라 나의 교육경험 자체가 나의 공부경험과 맞물려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채택된 것이다. 공부의 내용―작품 읽기를 제외한다면 대부분 이론들과의 만남으로 구성된다―이 학생들에게 가르쳐지는 대상이 되기보다는 가르치는 방식과 연관되고 있다는 점은 나의 교육경험의 특이성을 구성하는 한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런데 이러한 특이성으로 인하여 여기서 나의 제안이 과연 얼마나 보편적일 수 있는가는 나로서 장담할 수 없고 또 장담할 의도도 없다. 실상 전체에 적용될 수 있는 교육방식을 구상하고 제시하는 것 자체가 이 글의 저변에 깔린 논지―특이성을 일반화하여 전체로 확대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이기보다 서로 다른 특이성들이 만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진정으로 새로움을 낳는 데 기여하리라는 것―와는 상반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나로서는 나의 특이한 경험이 나와는 처한 상황, 경험, 감각 혹은 견해가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내가 공부의 과정에서 만난 언어에 관한 이론들 중에 최근의 시점에서 나의 교육경험과 맞물려 있는 가장 중요한 두 축은 리비스(F. R. Leavis)의 언어이론과 들뢰즈(Gilles Deleuze)와 가따리(Félix Guattari)의 언어이론이다. 이 두 언어이론들은 (차이의 존재는 어떤 것들 사이에서나 항상 당연한 것일 터이고) 언어를 정보전달의 수단으로 보지 않고 기표와 기의의 관계로 환원시키지도 않으며, 더 나아가 언어 속에서 삶과 죽음을 가리고 언어의 살아있음을 좁은 의미의 ‘언어’를 넘어선 차원―리비스의 경우에는 ‘제3의 영역’이고 들뢰즈와 가따리의 경우에는 ‘언표의 집단적 배치’([불]l'agencement collectif d'enonciation)―에서 본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통한다.

 

나는 이 글에서는 리비스보다는 들뢰즈와 가따리를 집중적으로 원용하였다. 이는 리비스를 ‘고리타분한 문학주의자’로 아는 (그리고 그렇게 아는 데서 그치는) 사람들이 저 바깥에 많다는 상황을 고려해서라기보다는 단순히 편의를 위한 것이다. 어떤 것을 짧은 지면에서 설명하는 데는, 주로 문학작품의 인용을 품고 있는 긴 맥락에 의해 자신의 생각을 제시하는 리비스를 활용하기보다는 개념의 창출을 자신의 업무로 삼는 들뢰즈와 가따리를1) (그들이 창출한 개념들을) 활용하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물론 이 글에서 활용되는 들뢰즈와 가따리의 개념들 자체를 설명하는 문제는 남지만, 이 글의 성격과 그 성격에 따른 지면의 크기는 이러한 설명을 충분히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최소한의 설명 말고는 독자들이 이 개념들을 일정하게 숙지하고 있다는 전제에서 이 글을 써나갈 수밖에 없다.2)


2


나는 1985년에 ‘뜻밖에’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대부분의 ‘초짜’ 교수들이 그렇듯이 나도 학생들에게 많이 가르치려는 의욕이 앞섰으며, 처음 맡은 과목에서 번역본이 없는 5편 정도의 단편소설들을 강의시간에 다룰 작품으로 선정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나는 진도를 다 나갈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 발표를 시켜보고는 곧 그러한 식의 강의를 지양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학생들이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를 해왔겠지만, 번역본이 없는 소설들을 다루기 때문에 제대로 내용을 소화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발표문은 전체적인 강의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내용을 잘 알지 못한 채로 그 내용에 대한 강의를 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영어교육도 아니고 문학교육도 아니었다.

 

따라서 나는 우선 영어해독능력을 증진하는 방향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번역본을 읽고 와서 내용에 대한 토론만 하는 것도 가능하기는 하였으나 나로서는 택하기 싫었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이 생각을 많이 하면서 텍스트를 해독하게 하는 방식의 강의를 택하게 되었다. 텍스트를 하나만 택하고 그 텍스트를 얼마나 많이 읽느냐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처음부터 읽어나가면서 학생들에게 무수히 질문을 했고 학생들 스스로 생각해서 답을 하도록 시간을 주었다. 하나의 질문을 만족할 만한 대답이 나올 때까지 반복한 적도 있었다. 물론 설명도 많이 했다. 졸업한지 10년쯤 지나 나와 만나게 된 어떤 졸업생이 내가 한 단어를 설명하는 데 한 시간을 들인 적이 있다고 말했을 때 잊었던 나의 ‘기록’을 알게 되기도 했다. 그러니 ‘진도’를 많이 나갈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질문의 초점은 일차적으로는 단어들 사이의 관계를 묻는 것이었고 (그래야 하나의 문장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안다) 그 다음은 우리말로 옮겨보는 것이었다. 우리말로 옮겨보는 데서 주안점은 주어진 맥락 속에서 단어들이 갖는 의미를 찾는 데 있었다. 이 ‘주어진 맥락 속에서의 의미’는 우리말로 한번 옮겨보지 않고서는, 그것이 우리말 옮김의 전체 속에서 어떻게 어울리는지를 확인해보지 않고서는 확정하기 힘든 것이었다. 설명을 많이 했지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설명의 마지막 지점에서 나로서는 최선을 다한 우리말 옮김을 제시해주었다. 당시에는 번역본이 없는 작품만 골라서 다루었고 또 시험에 주로 우리말 옮김을 냈기 때문에 강의시간에 잘 듣지 않은 학생이 좋은 점수를 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나는 영어문장을 ‘대충’ 파악하여 옮기는 것을 삼가게 하고 토씨 하나하나까지 신경을 써서 우리말로 옮기도록 했으며, 또 시험답안지를 채점할 때에도 문장을 나누어 부분마다 점수를 부여해서 합산을 했다.

 

이러한 식의 교육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를 ‘객관적으로’ 판단하기는 힘들다. 학생들은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지만, 다행히도 그 당시의 학생들은 지금의 학생들에 비해서 인내심과 끈기가 좋았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의 학생들보다 훨씬 어른스러웠다. 일단 스트레스를 이겨내면 영어실력은 어쨌든 상승하는 쪽이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선생이든 학생이든 출석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출석부는 출석을 부르는 용도로서보다는 질문을 하는 순서를 정하는 데 더 유용했다. 전체적으로 학생들이 요즘처럼 편집증적으로 학점에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내 기억에 그 당시는 그저 ‘배우러 왔기 때문에 배우고 가르치는 일이 자기 일이기 때문에 가르친’ 시절로 남아있다.

 

그런데 학생들의 문화에 변화가 조금씩 일기 시작했다. 이러한 문화적 변화는 졸업정원제에서부터 서서히 시작되어,3) 이른바 ‘IMF 사태’ 이후로 ‘대세’가 되었다. 그 사이에 김영삼의 대학비리개혁이 있었는데, 그 동안의 민주화투쟁의 성과로 이루어진 ‘문민정부’가 행한 개혁은 아이러니하게도 대학 권력의 근대적 조직화의 촉진제가 되었으며, 서울대에서부터 시작된 대학개혁 혹은 ‘학부제개혁’을 거치면서 민주화와는 전혀 거리가 먼 방식의 대학운영의 조직화가 공고히 되었고 그 속으로 자본의 논리가 거의 아무런 제지도 없이 파고들었다.

 

대학 권력의 이러한 근대적 조직화는 교육과정을 하나의 잘 통제된 과정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교수가 학생을 통제하는 과정이 아니다. 이제는 교수와 학생 모두가 통제당하는―예컨대 출석을 꼭 확인해야만 하는 교수와 출석에 강박관념을 가진 학생들, 학생을 평가하는 교수와 교수를 평가하는 학생 ―이중적 통제과정이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학생들은 점차 변해갔다. (교수들이 어떻게 되었느냐는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우선 학생들은 졸업 후 취업의 어려움에 강박되어서 학점과 출석에 더 소심하게 신경을 쓰기 시작했고, 인내심과 끈기 혹은 지구력이 눈에 보이게 감소되었다. 그래서 예전처럼 번역본이 없는 영어텍스트를 끊임없이 질문을 해가면서 읽는 방식의 강의는 적절하기 못한 것이 되었다. 학생들이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강의 시간에 조는 학생들이 유난히 늘어나고 있는데, 이는 잠을 못 잘 정도로 공부를 해서가 아니라 강의의 내용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신경이 소모되어서 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에 따라 이제는 번역본이 있는 텍스트를 택해서 미리 전체의 줄거리를 파악하게 하고, 강의 시간에 다룰 부분을 발췌하여 비교적 상세한 주석을 달아서 미리 공부하도록 나누어주는 방식을 점차로 택하게 되었다. (디킨즈의 『어려운 시절』의 경우처럼 내가 많이 사용하는 텍스트의 번역본이 그 사이에 나온 덕을 입기도 했다.)

 

이 방식은 학생들이 주석으로 달린 단어나 어구의 의미를 그대로 외우는, 그리고 그만큼 사유를 하지 않는 부작용을 동반하였다. 사실상 새로워진 상황에서 학생들에게 두드러지게 증가한 특징이 바로 이 ‘외우는 공부’(‘복제하는 공부’)이다. 일반적으로 외우는 공부는 누구나 귀찮아하게 되어 있는데, 새로운 유형의 열심히 하려는 학생들은 생각하는 것은 싫어해도 선생님이 말한 것을 써놓았다가 외우는 일을 잘한다. 실상 학생들이 의식하든 아니든 외우는 공부는 영어와 우리말의 관계를 일대일 대응(재현의 한 방식)으로 보는 언어관을 함축한다. 나는 어느 때부터인가 이러한 언어관이 학생들의 영어실력을 일정한 선에 묶어 놓는 범인임을 알았으며 이후부터 외우는 공부를 교육에 있어서의 나의 주된 적으로 삼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외우는 공부는 단순히 영어실력의 차원을 넘어선 해악을 끼친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진정한 사유의 능력이 양성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사유하는 것은 외우는 것을 중지하는 것이다.4) 따라서 생각의 흐름에 어떤 파열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파열이 일어날 때 우리의 정신은 미지의 것과 만나게 되고 예전에 가졌던 생각이 이러한 미지의 것에 대해서 무력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며 그리하여 새로운 생각을 더듬어서 찾게 된다. 이는 로런스(D. H. Lawrence)의 말을 빌자면 외움이 가져오는 ‘자동적’(automatic) 반응에서 벗어나 ‘창조적 무의식’으로 즉 ‘원천’으로 다시 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매일매일 원천으로부터 새로이 시작해야 한다.”5) 이 말을 상황에 맞게 변경하자면, 텍스트의 모든 곳에서 학생들이 자신들의 ‘창조적 무의식’으로 돌아가 사유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것이 여러 가지 장애로 인하여 현실적으로 아무리 어렵더라도, 이 방향을 지향하는 벡터를 품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교육과 학습이기를 바랄 수 없다.6)

 

따라서 나는 선생의 입장에서 어떻게든 무조건 외우는 것을 ‘방해’하고 생각하게 만들어야 했다. 확실하게 입증된 좋은 방법이란 없다. 아무리 설명을 자세하게 하더라도 그 설명에서 무언가 스스로 깨닫기보다는 그 설명의 결론인 우리말 옮김을 노트했다가 외우고 그렇게 외운 것으로 시험을 보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외워봐야 소용이 없는 형태의 시험문제를 개발하는 것을 한 방법으로 취하고 있기는 하다.7) 그러나 이것만으로 ‘대세’를 바꾸기는 어렵다. 물론 바꾸기가 어렵다는 것이 순응하라는 말이 될 수는 없지만 말이다.



현재 영어교육에서 대세는 ‘실용영어’의 강조인데,8) 나는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어떻게 하면 ‘사유’하도록 만들까 하고 고민하는 과정에서 ‘실용영어’ 이데올로기의 근본적 문제점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러한 확신은 ‘실용영어’라는 것이 학생들의 (적어도 영문과 학생들의) 영어실력을 높여주는 데는 무력하다는 사실, 따라서 별로 실용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다음으로 ‘실용영어’가 자본의 논리와 연결되어있다는 사실―낮은 수준의 영어에 대한 수요가 사회 전체적으로 많으며 자본은 당연하게도 수요가 많은 곳으로 경쟁적으로 쏠리고 자본의 논리를 내장한 모든 세력들(미디어, 대학운영자들, 학부모집단들 등등)이 이를 따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결국 ‘실용영어’가 이른바 ‘자본주의적 주체성’(가따리의 말이다)의 창출에 한몫 기여하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내가 보기에 ‘실용영어’라는 관념의 핵심은 언어를 정보전달과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격하시키는 데, 혹은 생계를 버는 수단으로 격하시키는 데, 그리하여 창조적 사유와 분리하는 데 있다. 이러한 격하와 분리는 인간의 사유와 상상과 욕망을 현재 우세한 자본주의적 관계들에 가두는 데 복무하며 따라서 자본의 증식을 영속화하는 방향으로 욕망하고 상상하고 행동하는 주체성을 창출하는 데 복무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체성은 (실상 사회의 모든 곳에서 창출된다고 해야 하겠지만9)) 교육의 장소에서는 학습을 ‘자본표’가 찍힌 ‘실용학예’로 환원한 바탕 위에서 가장 잘 창출될 수 있다.

 

반대로 이는, 이제 교육의 현장 자체가 자본 및 권력과 싸워야 하는 현장이기도 하다는 점이 명시적으로 되었음을 함축하기도 한다. 따라서 만일 우리의 교육이 영어로 된 문학작품을 읽히는 것이라면 바로 그 과정의 한 가운데에서, 작품의 ‘주제’나 ‘소재’ 이전의 차원에서 자본 및 권력과의 싸움이 벌어져야 한다. “언어는 언어학의 문제이기 이전에 정치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10) 여기서 정치란 전통적인 의미의 정치가 아니다. 삶과 죽음의 문제이다.11) 또한 삶과 죽음의 문제란 단순히 생물학적 생명의 지속과 중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생물학적 의미의 죽음이 삶의 훌륭한 표현이 될 수 있음을 실제 역사에서, 그리고 문학작품들에서 수없이 보아왔다.) 실재(reality)의 한 쪽 극단에는 고정화되고 굳어지고 각질화되고 법칙화되며 위계화되는 움직임이 있다. 이것이 들뢰즈와 가따리가 말하는 ‘지층화’(stratification)이다. 그 반대쪽 극단에는 어떤 미리 정해진 것을 벗어나서 새로움을 창조하는 움직임이 있다. 바로 들뢰즈와 가따리가 (절대적) 탈영토화라고 부르는 것인데 이것이 일어나는 차원이 공재의 평면(plane of consistency)12)이고 이 평면 위의 고원들이 바로 추상기계(abstract machine)이다.13) 지층화가 바로 죽음의 벡터이며, 공재의 평면 위에서 추상기계를 향해 일어나는 창조적 변이의 연속이 바로 삶의 벡터이다.

 

이는 언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일반적으로 언어학자들이 말하는 언어, 즉 기표와 기의로 환원된 언어가 바로 지층화된 언어이다. 이는 이미 정해진 음성학적, 통사론적, 의미론적 상수들, 요소들, 관계들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각 단어들은 이미 확연하게 정해진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재현)하는 기능에 국한된다.14) 그러나 언어 속에서도 공재의 평면이 구성되고, 살아있는 추상기계가 작동할 수 있다.15)  공재의 평면이나 추상기계는 언어에서 새로움의 창조가 일어나는 측면 따라서 살아있는 측면으로서, 문법을 포함한 언어학적 법칙이나 어떤 자립적이고 고정된 구조로 포괄될 수 없는 측면이다. 이렇듯 다른 모든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언어에서도 삶과 죽음이 두 핵심적인 벡터이다.

 

학생들로 하여금 언어에서의 추상기계를 문학작품을 통해서 체험하게 하는 것이 내가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영미문학교육인 동시에 영어교육이며, ‘실용영어’의 형태를 띠고 나타나는 자본의 논리와 언어의 영역에서 싸우는 것이다. 이는 학생들에게 어떤 영문학적 지식을 주입하는 것과 다르다. 학생들로 하여금 작품 속에 들어있는 공재의 평면 혹은 창조적 추상기계를 만나게 하여 그 만남 속에서 자신의 사유를 발전시키도록 하는 것이다. 학생의 입장에서 이는 탐구이며 실험이고 물음묻기가 될 것이다. 공재의 평면 혹은 창조적 추상기계는 이른바 특이한 ‘사건들’(언어의 경우에는 특이한 ‘의미들’)로 구성되므로 기존의 법칙이나 가치체계로서 설명이 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론에서 이미 시사하였듯이, 내가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된 것은 강의실에서의 경험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한때 문학은 현실의 반영(재현)이라는 생각에 갇혀 있었는데, 이는 언어를 그 자체로 아무런 존재감이 없는, 없어야 하는, 투명한 전달매체로 보는 시각을 함축하고 있었다. 이에 따르자면 문학의 창조성은 현실을 얼마나 핍진하게 반영했느냐에 비례하게 된다. 그러면 현실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변화 ―예컨대 사회 혁명 ―에 문학은 그저 수동적으로 반응할 수 있을 뿐 아무런 능동적 역할은 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 문학에 상상력이니 뭐니 하는 좀더 듣기 좋은 말들을 양념처럼 적용한다고 해서 사태가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사고방식은 필연적으로, 모든 의미있는 현실변화는 정치권력을 통과해야, 정치권력에 의해 매개되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도달하게 되어있다. 80년대의 급진적인 전위들에게 지배적이었던 바로 그 결론이다.

 

나는 반영론적 인식론에 입각하고 있는 전위주의의 문제점을 개인적으로 절감하면서 언어를 보는 눈, 문학을 보는 눈도 달라졌다. 살아있는 언어는 결코 수동적인 매체나 도구가 아니라 어떤 힘의 발현일 수 있으며, 현실의 다른 부분처럼 삶과 죽음이 늘 서로 다투고 있는 곳 즉 새로운 변이가 계속적으로 일어나는 동시에 그 변이를 법칙과 구조의 이름으로 포착하는 지층화가 늘 일어나는 곳이었다. 따라서 이제 ‘현실의 재현’으로는 문학의 창조성을 적실하게 말할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으며, 전례없는 새로운 실재의 창조가 바로 문학의 창조성의 핵심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언어관이 한편으로는 새로운 형태의 비평을 낳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에서 언어에서의 삶정치적 투쟁을 보게 해주었던 것이다.


 

그러면 살아있는 언어로서 영어를 체득하게 하는 데서 우리말로 옮기기가 어떤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우선 번역이 언어의 속성과 어떤 연관을 맺는지를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들뢰즈와 가따리가 보기에 좁은 의미의 언어는 이중적 분리―‘표현’(언어가 불러일으키는 비신체적인, 즉 잠재적인 실재)이 ‘내용’(신체들bodies로 구성되는 액추얼한 실재)으로부터 분리되는 동시에 ‘표현’의 ‘형식’(기의에 해당되는 것)도 ‘질료’(substance, 기표에 해당되는 것)로부터 분리되는 것―의 결과이다. 전자는 언어가 다른 현실로부터 분리되어 그 고유의 법칙들에 따라 연구되는 자율적인 존재가 된 측면을 가리키고 후자는 ‘하우스’(house)라는 음성 혹은 문자(질료)와 ‘집’이라는 음성 혹은 문자(질료) 모두에 덧씌워질 수 있는16) 표현형식(기의)의 존재가능성을 가리킨다. 언어 사이의 번역가능성은 후자에서 온다. 두 언어의 표현의 질료에 모두 씌워질 수 있는 표현의 형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번역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17)

 

여기서 번역은 ‘표현’의 형식이 ‘표현’의 두 ‘질료’를 장악하는(덧코드화하는) 방식이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상이한 두 계열에 속하는 기표(‘집’과 ‘house’)가 두 기표에 공통되는 기의를 매개로 서로 병렬적으로 대응하는 식이다. 이는 기의의 관점에서는 일종의 ‘중복’을 낳는 셈이다. 여기서 한 계열의 기표가 다른 계열의 기표를 장악할 가능성이 발생할 수 있고, 현재 우리가 목격하고 있듯이 영어의 제국주의적 공용어로서의 가능성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영미문학작품의 우리말 옮김을 덧코드화의 측면에만 국한한다면, 다시 말해서, 일정한 순서의 영어 단어들에 일정한 순서의 한국어 단어들을 대응시키는 데 국한한다면, 이는 언어를 지층의 관점에서만 접근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내가 앞에서 말한, 작품 속에서 추상기계의 형성을 체험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 되고 만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어떤 작품을 선정하느냐가 중요해지고,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가 중요해진다. 작품들은 주제별, 소재별, 시기별 등등으로 다를 뿐만 아니라 그 언어의 살아있는 활력의 강도(intensity) 즉 공재의 평면 혹은 추상기계가 형성되는 정도도 각각 다르다. 그런데 활력의 강도가 높은 걸작일수록 ‘어렵다’는 범주에 속하기 쉬우므로 실제로 작품을 선정할 때에는 학생들의 영어이해능력에 대한 세심한 고려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활력이 소용돌이치는 지점, 그리하여 덧코드화의 발현으로서의 번역이 파열되는 지점에 초점을 두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해서 번역의 과정 자체가 지층화의 방향을 거슬러 추상기계로 도달하는 과정이 되도록 해야 한다.

 

실제로 학생들은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 우리말 능력의 일반적인 부실함으로 인하여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말 능력’이란 단순히 한국어 기표들을 숙지하는 문제가 아니다.18) 거기에는 그 동안의 삶의 경험이 모두 관여된다. 그런데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우리말 능력에 관계없이 영어를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듯하다. 그리하여 언어공부를 기표라는 도구를 다루는 기술의 숙련의 문제로 본다. 그런데 좋은 텍스트를 우리말로 옮겨보게 하면 이런 사고방식의 문제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영어를 우리말로 잘 옮겨놓고도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냥 기표에 기표를 대응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반대 방향으로도 일어난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강의 시간에 신고전주의의 ‘삼일치’(the three unities)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혹시 있느냐고 물었더니 한 학생이 우리말로 답할 수 없는데, 영어로는 답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다른 과목의 강의시간에 영어로 시험을 위해 외운 것을 그대로 읊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맞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이 학생은 ‘삼일치’가 무엇인지 이해하지는 못한 채 기표의 차원에서 그냥 외웠던 것이다. 언어를 기표-기의 관계를 넘어서서 들뢰즈와 가따리가 말하는 ‘배치로서 경험하는 일은 어느 언어에서든 가능하다. 그런데 근 20년 동안 자신의 모국어인 한국어에서 이런 경험을 미미하게밖에는 못한 학생이 영어에서 갑자기 그런 경험을 탁월하게 할 가능성은 낮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19) 우리말 공부와 겹쳐지거나 결합되지 않는 영어공부란 없다.

 

따라서 우리는, 번역은 덧코드화가 작동하는 식으로 두 언어가 만나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배치’가 만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영어 한 단어, 한 문장을 우리말 한 단어, 한 문장으로 옮기는 경우일지라도 그렇다. 그리고 이렇게 두 ‘배치’가 만나는 데서 열리는 새로운 의미의 공간들에서 새로운 연결의 창출에 대한 감각을 획득할 수 있다. 실상 좋은 문학작품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이른바 뿌리줄기(rhizome) 유형의 연결들(모든 방향으로의 자유로운 연결)로 가득하다. 단어들, 혹은 문장들의 미리 정해진 규칙적 관계는 물론이고, 문장과 문장 사이의 논리적 연결이나 단순한 스토리라인을 넘어서는 아주 많은 열려진 (즉 미리 정해지지 않은) 연결들이 존재한다.20) 내가 교재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작품인 디킨즈의 『어려운 시절』의 한 대목(1권 5장)을 예로 들어보자.


It contained several large streets all very like one another, and many small streets still more like one another, inhabited by people equally like one another, who all went in and out at the same hours, with the same sound upon the same pavements, to do the same work, and to whom every day was the same as yesterday and to-morrow, and every year the counterpart of the last and the next.



여기서 ‘표현되는 바’(the expressed)―이는 코크타운이 보여주는 획일적인 측면들(large streets, small streets, people, hours, sound, pavements, work, day, year)에 귀속된다―는 ‘표현’ 자체에서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반복들(all very like one another, still more like one another, equally like one another, the same, the same, the same, the same, the counterpart)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이 점을 잘 알고 세심하게 고민하지 않는다면 (마구 ‘의역’을 하거나, 담긴 정보만 요약적으로 전달하는 식으로 옮기면) 많은 것을 놓치게 된다.

 

더 나아가 작품 속에서 형성된 추상기계로 인해 ‘번역불가능의 지점’과도 같은 것을 접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셰익스피어의 『앤터니와 클레오파트라』 중 에노바버스(Enobarbus)의 대사의 일부인


     I will tell you.

The barge she sat in, like a burnish'd throne,

Burn'd on the water; ...



에 대하여 리비스가 ‘b’로 시작하는 세 단어―‘barge,’‘burnish'd,’ ‘burn'd’―의 연속이 주는 효과는 'burn'd'로 하여금 그 의미가 감각적으로 구현되게 하고, ‘burn’이 가진 힘은 ‘burnish'd’를 거쳐서 ‘barge’로 되돌아간다고 말했을 때21) 리비스는 번역이 거의 불가능한 관계―이 관계가 통사론적 관계를 포함한 언어의 일반적인 상수적(常數的) 관계를 넘어서는 것임을 말할 것도 없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관계에서 작용하는 새로운 연결의 창출이 한국어로의 덧코드화에 완강히 저항하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기의(記意)와는 다른 차원의 특이한 의미가 생성되는데, 여기서는 형식을 질료와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 리비스가 논의의 와중에서 “셰익스피어의 운문은 그 의미를 실행하는 듯하며, 어떤 대상에 대하여 말하기보다는 행하고 주는 것 같다”라고 했을 때 그는 바로 이것을 포착한 것이다.22) 바로 이런 것이 살아있는 추상기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추상기계의 차원이 그 특이성으로 인하여 대응되는 한국어 기표를 구하기 힘들다고 해서 (결과적으로 우리말로 옮기기 힘들다고 해서) 이것을 어떻게든 옮겨보려는 노력이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대목과 씨름하는 순간 번역자는 단순한 전달자, 혹은 매개자가 아니라 탐구하는 창조자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추상기계와의 연결은 덧코드화가 함축하는 중복(하나의 형식에 여러 개의 질료)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새로운 창조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번역자는 우리말 자체에 변형을 가할 수도 있다.23)

 

학생들을 모두 번역전문가로 만들 것을 직접적인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니 번역의 매우 세밀한 기술적인 문제와 관련된 이야기를 여기서 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다만, 내가 현재까지의 경험의 정점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두 언어의 만남(번역)을 덧코드화의 과정으로만 경험하지 않고 추상기계의 작동을 중심으로 하는 만남, 번역불가능성을 중심으로 하는 만남으로서 경험하려고 할 때 그것이야말로 훌륭한 영미문학교육이요 영어교육이며, 창조적 사유의 촉진이고 따라서 삶정치적 교육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은 문학작품 읽기에만 국한되는 교육이 결코 아니다. 추상기계의 특성인 모든 방향으로의 연결가능성은 추상기계 내적으로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추상기계와 그 외부의 관계에 대해서도 해당되기 때문이다. 한 언어의 다른 언어와의 만남이나 추상기계의 그 외부와의 만남은 원리적으로 하나도 다르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작품은 거울이라기보다 (들뢰즈와 가따리가 말한 대로) 뿌리줄기이다. 훌륭한 작품일수록 자체 내에서뿐만 아니라 외부―당대의 현실, 문학작품 등을 통해 존재하게 되는 실재인 잠재적인 세계, 미지의 미래 등등―와 많은 연결들을 가지고 있다. 디킨즈의 『어려운 시절』의 한 대목을 보자.


  Although Mr. Gradgrind did not take after Blue Beard, his room was quite a blue chamber in its abundance of blue books. Whatever they could prove (which is usually anything you like), they proved there, in an army constantly strengthening by the arrival of new recruits.



여기서 첫 번째 밑줄친 부분은 잠재적인 세계의 인물과 연결되어 있고, 두 번째 밑줄친 부분은 당대 사회의 어떤 소소한 관행과 연결되어 있다. 두 번째 문장은 그 전체가 당대 사회의 또 다른, 이번에는 매우 중요한 어떤 관행과 풍자적ㆍ비판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대목을 충실하게 옮기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이라면 이 연결을 추적해 보려고 노력할 터인데, 이러한 추적은 당연하게도 문학의 영역을 넘어선 독서의 도움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연결이 다양할수록 읽어야 하는 책의 종류도 다양해질 것이다.

 

물론 이는 시간과 기타 조건이 주어질 때 지향해야 할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지 무조건 당장 실현되어야 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는 읽는 양을 학생들이 소화할 수 있는 것보다 많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 선을 넘을 때 학생들은 아예 포기하거나, 아니면 이 많은 양을 대신할(요약할, 대표할) 편법적 형태의 지식(친구의 노트, 인터넷의 쪼가리 지식 등등)에 의존하게 되며 결국 자신의 사유를 발전시키는 핵심적 과정은 누락되게 된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공부가 아니다.

  잘 하는 학생과 못 하는 학생을 가리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오히려 읽는 양이 많으면 이런 구분을 하기에는 더 좋은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교육은 평가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 각각의 지적ㆍ감성적 발전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발전을 위해서는 “아무리 투박하고 단순하더라도 (...) 모든 사람의 기질과 본성에는 더 좋은 것을 향하는 어떤 힘이 있다”는 러스킨의 말24)과 교육은“늘 변화하고 늘 펼쳐지는 창조의 산출”이 되어야 한다는 로런스의 말25)을 우리의 모토로 삼아야 한다.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교육은 어떤 수준에서든, 학생들이 수준이 어떻든, 그 수준에서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상상하게 만드는 교육이다.26) 그러기 위해서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고유한 방식으로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줄 수 있어야 한다. 러스킨이 하급 장인들(노동자들)에 대하여 한 다음의 말은 우리의 학생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둔한 상상력, 굼뜬 정서, 뒤뚱거리며 진행하는 사유가 존재한다. 심지어는 최악으로 존재할 수도 있다. 대부분의 경우 이렇게 둔하거나 굼뜬 것은 우리 모두의 잘못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들을 취약한 채로 받아들이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면, 불완전한 상태 자체로 최고의 가장 완벽한 육체적 솜씨보다 더 높은 것으로 평가하고 존중하지 않는다면 이것들이 강해질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노동자들을[학생들을! ― 인용자] 바로 이렇게 대해야 한다. 그들에게서 생각이 깊은 부분을 찾고, 그 부분을 그들로부터 끌어내야 한다. 우리가 그 대가로 무엇을 잃든, 무슨 잘못과 오류를 범하게 되든 그렇게 해야 한다. 그들에게 있는 최고의 것은 많은 오류를 동반하고서만 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27)



학생들에게 오류와 잘못을 범할 권리와 시간을 충분히 주는 교육, 이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교육이다. 주어진 것을 잘 외우는 것보다 오류와 잘못을 범하면서 더듬거리듯이 나아가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사유의 능력을 담지하는 주체성을 키워내는 데 더 큰 기여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실용적인 측면을 무시해서는 안되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는 실용과 창조성을 배타적인 것으로 보는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는 창조적 사유의 능력만큼 진정으로 실용적인 것은 없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영어를 실제의 현실 속에서 실제로 구사하는 능력(읽고, 쓰고, 듣고, 말하기)이고 (나는 이것을 ‘실용영어’라고 부르지 않고 ‘실전영어’라고 부를 것이다) 이러한 능력을 높이는 데에 학습자의 창조성과 능동성만큼 효과적인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이러한 창조성과 능동성을 키우는 교육이 실용적이 아니라면 무엇이 실용적이란 말인가! 실제로 나는 20여년 동안의 나의 경험을 통해 나의 교육방식이 가장 일반적인 의미의 영어실력을 높이는 데 있어서 상당한 위력을 지니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다. 다만, 나는 이것을 나에게 주어진 조건―여기에는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오기 전에 도달한 영어실력의 수준도 포함된다―에서 현대 자본주의와의 싸움이라는 측면과 내적으로 연결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1) 개념의 창출을 철학자 고유의 일로 보는 데 대해서는 Gilles Deleuze and Félix Guattari, What is Philosophy? Trans. Hugh Tomlinson and Graham Burchell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4)  참조.


2) 만일 누군가가 경험을 그냥 옛날 이야기하듯이 제시(기술?)하는 것은 어떠냐고 한다면 나는 그것은 경험의 표면만을 제시하라는 요구와 같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또한 누군가가 이 ‘어려운’ 개념들의 도움 없이 순전히 나의 말로 풀어서 설명할 수는 없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것은 나에게 책 한권을 쓰라는 요구나 다름없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나에게 그럴 여유와 지면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3) 졸업정원제는 80년부터 시행되기 시작하여 우여곡절을 겪다가 1988년에 폐지되었다.


4) 물론 시의 중요한 구절 같은 것은 외우는 것이 좋다. 그런데 이는 한 번에 생각을 완료할 수 없어서 두고두고 생각해보기 위해서이며, 그 구절 자체의 존재와 친숙해지기 위해서이지, 자신의 생각이 아닌 것을 자동화기계처럼 입력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5) D. H. Lawrence, Fantasia of the Unconscious and Psychoanalysis and the Unconscious (1921, 1922; Harmondsworth: Penguin Books 1977) 183면.


6) 영어로 하는 강의를 늘리는 것이 영어실력의 향상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 점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식으로 영어와의 접촉을 늘리는 것은 사유의 촉진과는 대체로 무관하고 몸에서 영어에 대해 자동적 반응이 일어나는 정도를 높이는 것에 불과하다. 사유는 이러한 자동적 반응이 정지하는 곳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대학은 사유를 하도록 가르치는 곳이지, 재미있게 따라 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바람직한 유치원이 아니다.


7) 나는 언제부턴가 시험보는 그 자리에서 생각을 해야만 하는 형태의 문제를 내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휴대폰으로 다른 친구에게 답을 물어보아도 좋다고 반농담조로 말하는 경우도 있다.


8) 더 넓게 말하자면 신자유주의에 장악된 대학에서 ‘대세’는 이른바 ‘실용학예’(practical arts)의 강조이다.


9) 이것이 들뢰즈(Gilles Deleuze)가 ‘통제사회’라고 부른 것의 특징이다.


10) Gilles Deleuze and Félix Guattari, A Thousand Platea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Trans. Brian Massumi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7) 139-140면.


11) 그래서 나는 네그리와 하트를 따라서 이것을 ‘삶정치’라고 부른다.


12) 공재의 평면이란 미리 고정된 규칙이 없이 모든 방향으로 자유로운 연결이 일어나는 평면이다.


13) 들뢰즈와 가따리에게 추상기계는 세 유형이 있다. ① 지층화(stratification)의 추상기계―이는 공재의 평면을 다른 평면으로 둘러싼다. ‘기표-기의’ 체제가 그 한 예이다. ② 공리적 혹은 덧코드화(overcoding)하는 추상기계―이는 총체와, 동질화, 봉쇄하는 연결을 행한다. 자본과 국가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③ 공재의 추상기계(abstract machines of consistency)―이는 특이하고 연속적으로 변이하며 모든 방향으로 자유로운 연결을 증대시킨다. 이를 ‘살아있는 추상기계’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줄여서 ‘추상기계’라고 하면 ③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해서는 A Thousand Plateaus 514면 참조.


14) 이런 식으로 작용하는 단어들을 들뢰즈와 가따리는 ‘죽음’을 선고하는 ‘명령어’라고 부른다. 리비스는 이러한 식의 언어사용을 ‘산문적 언어사용’이라고 부른다.


15)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일반적인 ‘언어’는 ‘표현’(expression)의 형식화인 ‘기호 체제’(regime of signs)가 덧코드화(상대적 탈영토화)의 방식으로 더욱더 환원된 것이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배치’에서 절대적 탈영토화가 일어날 때 ‘추상기계’로의 이행이 가능해진다. ‘배치’([불]agencement)는 『천 개의 고원』의 핵심 개념들 중 하나로서, 실재(reality)의 최소 단위이며, ‘표현’과 ‘내용’(content)의 마디결합으로 이루어진다. ‘내용’은 신체적 변형과 관계되며, 표현은 비신체적(즉 잠재적인virtual) 변형과 관계된다.


16) 이렇게 덧씌워지는 것을 들뢰즈와 가따리는 ‘덧코드화’(overcoding)라고 부른다.


17) A Thousand Plateaus 62면 참조.


18) 방송에 나오는 한국어퀴즈 프로그램들은 기표의 차원을 넘지 못한다.


19) 그래서 나는 요즈음에는 틈만 나면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노력을 하더라도 현재의 우리말 실력을 영어실력이 따라갈 수는 없을 것이라고, 우리말 실력을 늘 갈고 닦지 않는 한 영어실력을 일정 한도 이상 늘릴 수는 없다고, 그러니 (제발!) 우리말 책 좀 읽으라고. 그러나 ‘실용학예’의 시대는 ‘분서’(焚書)는 아닐지라도 ‘망서’(忘書)의 시대인 것을 어찌할 것인가!


20) 로런스는 이러한 측면을 ‘섬세한 상호연관성’(subtle interrelatedness)라고 부른 바 있다. 로런스는 소설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지만 말하면서 이러한 측면이 소설에만 존재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21) 『앤터니와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그의 논의는 F. R. Leavis, The Living Principle: 'English' as a Discipline of Thought (London: Chatto & Windus 1977) 144-54면 참조. 이렇게 뒤에 온 단어가 앞으로 거슬러서 작용하는 것을 들뢰즈와 가따리는 ‘어구의 타동화’(transitivization of the phrase)라고 부른다. 이는 언어의 텐서(tensor)가 하는 일인데, 텐서는 바로 추상기계의 기능으로서 언어의 구성요소들로 하여금 기존이 경계, 구분, 범주들을 넘어서게 하는 것이다. A Thousand Plateaus 99면 참조.


22) 같은 책 146면.


23) 벤야민이 그의 「번역자의 과제」에서 한 다음의 말들은 나에게는 바로 그러한 측면을 지적한 것으로 읽힌다. “다른 언어 속에 유배되어 있는 순수언어를 자신의 언어에서 해방시키는 것, 작품 속에 갇혀있는 것을 그 작품을 재창조함으로써 해방시키는 것이 번역자의 과제이다. 순수언어를 위하여 번역자는 자신의 언어의 썩은 장벽들을 부수는 것이다.” Walter Benjamin, Walter Benjamin Gesammelte Schriften IVㆍ1 (Suhrkamp Verlag : Frankfurt am Main 1980) 20면.


24) John Ruskin, The Stones of Venice (New York : John Wiley and Sons 1891) 160-61면.


25) Lawrence, 앞의 책 608면.


26) 이는 심지어는 문법의 수준에서도 일어나야 한다. 내가 지향하는 교육이 추상기계를 향하고 있다고 해서 문법을 포함한 기본적인 규칙들을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 해도 된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실제로 나는 문법적 설명에 치중하는 사람이라는 오해를 종종 받는다.) 중요한 것은 문법을 무조건 외우고 따라야 할 것으로 가르치지 않고 다른 관점에서 가르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나는 예컨대 품사 같은 것은 일군의 단어들에 공통된 고유의 리듬(사물로 치면 고유한 진동 같은 것)이니 생각하지 말고 느끼라고 가르치며(이런 경우에는 자신이 직접 느끼는 것이 진짜 사유의 출발점이다), 때로 문법은 감옥과도 같은 것이어서 거기서 탈출을 하는 사람만이 영어를 잘 할 수 있고 또 탈출하려면 감옥을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이외에 다른 방식들이 가능할 것이다.


27) The Stones of Venice 161면.